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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국사의 가을
    사찰 풍경 2015. 11. 18. 22:50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의 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구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한 수많은 국보문화재와 보물문화재가 있고 매년 수백만의 내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의 뛰어난 불교예술작품들이 자리한 불국사를 방문하고 있다.

    과거의 뛰어난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불국사는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계시고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수행 처이기도 하다.

    또한 불국사는 한국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의 전시관으로서 세계에 한국불교와 한국의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 한국불교 수행정진과 지혜의 도량으로서 오늘도 끊이지 않는 용맹정진의 푸르른 서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 바로 불국사이다.

     

     

    <天地는 나와 한 몸이니라>

    석굴암에 올라가면 양쪽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버티고 서 있다. 이 중 한 쪽의 금강역사는 팔이 부러지고 없다. 왜 그런가 하니 마구니와 싸우다가 돌로 된 팔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다치지 않은 다른 금강역사는 팔에서 피가 솟아 올랐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天地與我同根이요 萬物與我同體니라.
    천지는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니라.

    옆에 앉은 사람을 한 번 때려 보아라. 때린 사람이 오히려 아파야 공부가 익었다 하리라.

    雲起南山雨北山.
    구름은 남산에서 이는데 비는 북산에서 내리도다.
    (월산선사)

     

    <기와를 간다고 거울이 되랴>


    노사께서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물으셨다.

    결제를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 철이 지나갔다.
    여러분들의 공부 소식은 여하한가?

    眼裏聞聲方始知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만 알게 되리라.

    마조 도일(馬祖道一)선사가 남악 회양(南嶽懷讓)화상 회상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어느날 회양선사가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 이를 본 마조선사가 물었다.
    ?스님은 왜 기왓장을 갈고 있습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럼 자네처럼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수레를 움직이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
    이 말에 마조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눈앞이 밝아졌다.

    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趣
    令心所向皆無礙

    누가 부처의 경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허공처럼 깨끗이 하라.
    망상과 온갖 견해를 멀리 여의면
    마음가는 곳마다 아무 장애도 없으리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상근정진(常勤精進)할 지어다.

    (월산선사)

     

     

    *  일체 유심 (一切唯心)

    단유언설도무실(但有言說都無實)이란 말로만 있지 실제는 그런일이 없다. 도무지 실다운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연기법칙(緣起法則)상대성 원리로 보아도그렇게 됩니다. 많다고 하면 벌써 부분입니다.정말 마지막 말로 전체를 많다고 하더라도 그건 하나 뿐이니까 많은것도 아니고 사실 또 하나도 아닙니다.
    더구나 많다 적다는 안됩니다. 벌써 많다고 할때는 적은것, 많지 않은 것을 이미 상대하고 있으므로 그건 전체에 그만한 부분을 빼고 하는 말이므로 그것은 전체에 비하면 적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작다고 하는 그것이 작은 것도 아니고 작다 했으니까 그건 크다는 말도되고 또 작지도 않다는 말도되고 그런게 아니란 말도되고 그럽니다.
    그것은 다 幻 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꿈 밖에서 꿈을 깨어 가지고 {그대로 전체가 꿈 아니라}고 하신 그게 바로 무실무허(無實無虛)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말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환의 존재이기 때문에 허망하다 실답다 하는 말을 붙일수 없는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 내가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 한다.}고 하셨읍니다.또한 그것도 무실무허 하다가도 그 경지에 들어서 놓으면 참다운 것도 있고 허망한 것도 있고 그렇게도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진 그경지는 시간을 여의어 일체 생각이 다 끊어진 때고 무분별지(無分別智) 본래의 실상 자리인데 그러면서 거기서 내내 중생살이와똑같고 하지만 보고 듣고 하는 마음을 지어서 작심으로 하는게 아니라무위(無爲) 무심으로 하는겁니다.
    그 경지에 가면 부처님의 살림살이 일 뿐이고 마음 하나 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러는데, 마음이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이라 지을조(造)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읍니다.
    {오직 마음 뿐이라}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그런뜻이 됩니다.

    주관이 곧 객관이고 거리가 없읍니다.거울 가운데 동서 남북이 있어 보이지만이것은 빛으로 그림자로 거울면에 나타난 것이지 거울을 뚫고 들어가서 동서남북상하 중간이 된 것은  아닌것과 같읍니다. 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전체 그대로가 거리가 없는 거고 실제로 멀어 거리가 있으면서 또 그대로 없는거고 그대로 전체가마음이고 그러니 일체법이 개시불법(一切法皆是佛法)이고 무실무허(無實無虛) 한 경지까지 하나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주관 객관의 관념이 없어져서 없어 졌다는 생각조차 없어지면 구공(俱空)인데 그래도 구공 됐다는 잠재의식이 남아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공의 도리가 하나로 쉽게 환용되지 않다가 점점 닦아서 수치(修治)돼들어가면,참 그야말로 미세한 습기까지 전자가 움직이고 에느르기가 움직이는 것보다더 미세한 폭으로 움직이는 그 <습기> 까지 마음에서 다 끊어지면 그때는 전체가 다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몽뚱그려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거냐 하면 그런것이 아니라 제망중중(帝網重重)의 도리로 그 가운데는 모래도 있고 흙도 돌도 있지만 모래 한알 그게 또 우주.인생 전체 이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큰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것이 아니고여기 먼지 한알이 그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떤거 하나를 들추어 이것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 이렇게 말할수가 없다 이겁니다.
    (청담스님)

     

    <凡夫노릇 그치면 곧 聖人>


    노사께서 법상에 올라 한참 양구하다가 대중에게 물으셨다.

    시회대중 가운데 눈 없는 사람 있는가? 귀 없는 사람 있는가? 코 없는 사람 있는가? 혀 없는 사람 있는가? 몸뚱이 없는 사람 있는가? 생각 없는 사람 있는가?
    시방삼세불 가운데 머리에 뿔난 부처 보았는가? 궁둥이에 꼬리 달린 부처 보았는가?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 가운데 팔다리가 세 개씩인 화상이 있던가?
    삼세제불과 천하 선지식과 여기 모인 대중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보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삼세제불과 천하 선지식은 무엇이 잘나서 부처이고 조사이며, 여기 대중은 무엇이 못나서 범부중생인가?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배움을 끊고 할 일을 마친 한가한 사람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진리도 구하지 않는다.
    무명이라 하는 것도 그 자체가 불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영가스님의 《증도가》 첫머리에 나오는 게송이다. 영가스님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대중들은 그대로가 부처로다. 더 이상 무슨 증명이며, 인가가 필요하단 말인가?

    한 납자가 백장화상을 찾아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백장화상이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저는 아무개입니다.”
    “그대는 나를 아는가?”
    “분명히 압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자(拂子)를 세우고 물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불자입니다.”
    “이것이 보이느냐?”
    “보입니다.”
    백장화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此道人人分上事
    如何擲地不回頭
    飢飡困眠非他物
    可笑騎牛更覓牛
    이 공부는 사람마다 자기 일인데
    어째서 버려두고 보지 않는고.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면 잠자면서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다니.  

    여기서 노사께서는 주장자를 들어 보였다가 내려친 뒤 다시 물으셨다.

    시회대중에게 묻겠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또 묻겠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들었는가?
    이것을 누가 보았고, 누가 이 소리를 들었는가?

    但盡凡情하라. 別無聖解니라.
    다만 범부노릇을 그치라. 성인공부가 따로 없느니라.
    (월산대종사 법어)

     

     

    청운교(靑雲橋) 및 백운교(白雲橋) / 국보 제23호

    대웅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 등의 옛기록에 의하면 위쪽이 청운교, 아래쪽이 백운교이다. 계단을 ‘다리(橋)’라고 한 것은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감을 상징한 것이다. 청운교는 16단, 백운교는 18단이며, 계단 경사면이 45°의 안정된 각도로 되어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이어지는 부분의 아래쪽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 홍예교와 홍예문의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석축(보물 제1745호),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제22호)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죽이는 칼 살리는 칼>

    노사께서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세우고 대중을 굽어 보다가 대갈하셨다.

    억!

    진여무언(眞如無言)이요 실상부동(實相不動)이라. 참다운 진리는 말이 없고 실상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산승은 이 자리에 오르기 전에 이미 30방을 얻어 맞았도다. 왜 그런가. 팔만대장경과 삼라만상이 벌어졌으니 이는 유언(有言)이고 동(動)이 아니던가. 그러나 무언의 모양은 유언이요, 부동의 모양은 동이라, 유언과 동을 떠나 무언과 부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해야 속이지 않고 30방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눈밝은 사람 있으면 이 산승을 불쌍히 여겨 그 방법을 일러주기를 바라노라.

    대중이 묵묵부답 하자 다시 일갈하고 주장자를 세 번 내려 치셨다.

    咫尺之間이나 不覩師顔이로다.
    지척간에 있는 데도 스승의 얼굴을 못보는구나.

    일기일경(一機一境)과 일언일구(一言一句)는 다 교화문이라. 마치 허벅다리를 자주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즉30방(動卽三十棒)’이라 잘못 이르면 다시 30방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지어다. 초학자는 불야타 조야타(佛也打 祖也打)로 부처도 치고 조사도 때리면 되는 줄 알지만 이는 사구(死句)에 머무는 것이니라. 일단 부처도 치고 조사도 쳤으면 다시 그것을 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부처도 살리고 조사도 살리는가?

    와우각(蝸牛角=달팽이 뿔)이니라.

    달팽이는 뿔이 두 개인데 하나를 건드리면 두 개가 다 들어가고, 나올 때는 둘 다 같이 나오니라. 이는 유(有)가 곧 무(無)요, 무가 곧 유이기 때문이니라.

    옛날 고려 때 나옹(懶翁)화상이 지공(指空)화상 문하에 계시다가 인가를 받아서 귀국하는 길에 평산 처림(平山處林)선사에게 인사를 하러 들렸다. 이 때 처림선사가 나옹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고?”
    “지공화상이 계신 곳에서 왔습니다.”
    “지공화상은 요사이 무얼 하시는고?”
    “일용천검(日用千劍)하고 계십니다.”
    “지공이 하루에 천검을 쓰는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다마는 너는 어떤 검을 쓰는고?”
    이 때 나옹화상은 처림선사가 깔고 있던 방석을 빼앗으니 선사가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야야, 이놈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나옹화상은 얼른 선사를 안아 일으키며 아뢰었다.
    “오차일검(吾此一劍)은 능살능활(能殺能活)이라, 나의 칼은 사람을 능히 죽이기도 하지만 또한 능히 살리기도 합니다.”
    이에 처림선사는 매우 만족하였거니와 이 한 마디가 없었다면 나옹은 나옹이라 할 수 없으리라.

    僧投寺裏宿
    賊入不愼家
    중은 절간에서 잠을 자고
    도적은 허술한 집으로 침입하도다.
    (월산대종사 법어)

     

    연화교(蓮華橋) 및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극락전 구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래쪽의 연화교는 10단, 위쪽의 칠보교는 8단이다.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제23호)보다 규모는 작으나 형태와 구조가 매우 비슷하다. 계단은 45°각도의 안정된 기울기를 보이며, 연화교와 칠보교가 이어지는 부분은 무지개 모양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연화교의 층계에는 계단마다 넓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계단을 밟는 사람이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석축(보물 제1745호), 청운교 및 백운교와 함께 8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통일신라의 계단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짚신이 곧 부처이니라>

    神光不昧하니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인댄 莫存知解하라.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구나.
    이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옛날 상주 남장사에서 나무하는 부목처사가 있었다. 늘 나무만 하는 것이 무료하고 고생스러워 절에 있는 노스님한테 가서 물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이 많아 이렇게 고생만 합니까? 어떻게 해야 노스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면 된다."
    "뭐라고요? 짚신이 부처라고요?"
    나무꾼은 짚신이 곧 부처라는 말이 화두가 되어 오매불망 그것을 참구했다. 나무를 하면서도 '짚신이 불이라' 참외밭을 가꾸면서도 '짚신이 불이라'하고 일념으로 의심을 했다. 어느날 이 처사는 다 떨어진 짚신을 불에 태우다가 깨달았다. 부목은 좋아라 하면서 노스님을 찾아가 아뢰었다.
    "스님. 짚신이 시불이라 하더니 정말로 짚신이 부처이구먼요."
    "이 사람아, 짚신시불이 아니라 즉심시불일세."
    "스님은 즉심시불하세요. 저는 짚신시불입니다."
    부목처사는 그날부터 나무를 하러 가거나 참외밭을 매거나 항상 콧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살았다.

    옛날 중국의 대매법상이 마조화상으로부터 즉심시불(卽心是佛)이란 말에 깨달았다. 나중에 누가 찾아와 요즘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한다고 하니 그래도 자기는 즉심시불이라 했다. 부목처사의 얘기도 대매법상의 얘기와 같지 아니한가. 일념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면 ?즉심시불?이나 ?짚신시불?이나 다 같은 것이다. 이것이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는 것이니 알음알이로 알려고 하지 말고 바로 보라. 그러면 내일이라도 눈앞이 환해지는 소식을 얻으리라.

    법문을 듣던 대중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자 노사께서도 한참 웃다가 게송을 읊으셨다.

    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휘영청 달이 밝아 강산은 고요한데
    터지는 웃음 소리 천지가 놀라겠네.
    (월산대종사법어)

     

     

    <참다운 神通과 妙用>

    三處傳心如何事
    靈山會上擧拈花
    多子塔前分半座
    鶴林槨中示雙趺
    삼처전심이란 어떤 일인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임이요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눠 앉음이요
    학림의 관 속에서 두 발을 보임이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번이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한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이다. 첫번째는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하다가 부처님이 꽃을 들었는데 이 소식을 안 가섭존자만이 혼자 빙그레 웃었다. 두번째는 다자탑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가섭존자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부처님이 가섭을 불러 당신이 앉은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게 했다. 세번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가섭존자가 임종을 못보고 늦게 도착했다. 그 때 부처님은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보였다. 이것이 바로 삼처전심이다.
    선불후불(先佛後佛)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은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 선문(禪門)의 참다운 신통묘용(神通妙用)이다. 선문의 신통묘용이란 하늘을 날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둔갑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법을 상전(相傳)하되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이는 오직 선문에만 있는 것이요 다른 종교나 학문에는 없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실로 묘한 것이어서 아는 사람만이 알 뿐,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 칼이 날카로운 것을 철부지 아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그래서 고인은 ?여인음수 냉난자지(如人飮水 冷暖自知)?라 했다. 물을 마셔보아야 스스로 차고 더운 것을 알지 말로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맛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신통묘용이 통하는 것이니 제불제조(諸佛諸祖)가 서로 눈 한번 찡긋하면 알아차리고 인가를 하고 심인을 전하는 것은 다 이와 같은 묘용의 일이니라.

    옛날 위산 영우(潙山靈祐)선사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제자 앙산(仰山)이 찾아왔다.
    이를 본 앙산이 스승의 낮잠을 힐난했다.
    "스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위산선사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내가 마침 묘한 꿈을 하나 꾸었네. 자네가 나에게 그 꿈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 않으려는가?"
    앙산은 대답 대신 밖으로 나가더니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스님. 세수나 하시지요."
    위산이 흡족해 하면서 세수를 하고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향엄(香嚴)이 들어왔다. 위산화상이 향엄에게 말했다.
    "나는 아까 꿈을 꾸었고, 그 꿈 얘기를 앙산에게 한 뒤 문답을 마쳤다. 자네도 그것이 어떤 꿈이었는지 내게 한번 물어보지 않으려는가?"
    향엄이 이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더니 이번에는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와서 말했다.
    "스님. 차나 한 잔 드시지요."
    스님은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신통이 목련존자보다도 낫구나!"

    그대들은 이 고화를 들으면서 신통묘용이 어떤 것인지 알았는가?

    吾常呼汝汝斯應
    汝或訊吾吾輒酬
    莫道此間無佛法
    從來不隔一絲頭
    내가 너를 부르면 너는 응답하고
    네가 나에게 물어오면 나는 응답했네.
    이 사이에 불법이 없다 말하지 말라
    실오라기 한 가닥도 가리지 않았도다.
    (월산대종사 법어)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 제26호)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었는데,
    극락전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로 꼽힌다. 높이 1.77m,머리 높이는 55cm,폭은 1.36m이다.
    본래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그 뒤 현재의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본존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다.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호)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된 금동불이다.
    높이 180cm, 머리 높이 48cm이며,
    무릎 너비는 125cm로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 비해 3cm 가량 크다.
    수인은 아미타 부처님께서 취하는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과 반대방향으로 취하는 수인이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다보탑(多寶塔) / 국보 제20호


    석가탑, 다보탑이라는 이름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다보 부처님이 증명하였다고 하는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탑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세워졌다. 다보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형식인 석가탑과는 달리 목조 건축의 여러 요소들을 조합한 독창적인 형태의 탑으로, 높이 10.3m이다. 기단 위에 놓인 돌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없어져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탑 내부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도 1925년의 수리공사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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