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월명암
    사찰 풍경 2015. 11. 29. 17:03

    내변산 산행길에 지나게 되는 월명암 풍경입니다.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변산반도 풍경이 아름다운 암자.

    월명암에 노란 모과 열매만이 나무에 열려 겨울의 초입 월명암 풍경을 아름답게 합니다.

    부설거사가 세웠다는 월명암 아름다운 암자입니다.

     

    월명암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중계리 변산 쌍선봉(, )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691년(신문왕 11) 고승 부설()이 창건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고승 진묵()이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1863년(철종 14) 성암()이 중건하였다. 1908년에 불탄 것을 1915년에 학명()이 중건하였고, 1956년에는 원경()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에서 몇 안 되는 산상무쟁처()의 한 곳으로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함께 호남지방의 3대 영지()로 손꼽히는 곳이며, 봉래선원()이 있어서 근대의 고승인 행암()·용성()·고암()·해안()·소공() 등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인법당()을 비롯하여 산신각()·운해당()·수각()·요사채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쌍선봉 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는 묘적암()이 있다. 이 중 운해당과 묘적암, 요사채는 최근에 주지 종흥()이 신축 또는 중수한 것이다. 특기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묘적암 위쪽에 있는 2기의 부도()가 주목된다. 사찰측에서는 이부도 중 왼쪽에 있는 석종형 부도가 부설의 사리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부설전()」에는 그가 죽은 뒤에 다비하여 사리를 묘적봉 남쪽 기슭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절의 앞쪽으로는 의상봉()과 가인관음봉() 등의 암봉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있고, 법왕봉()에 올라 바라보는 일몰 광경이 빼어나다.

     

    부설거사와 묘화부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는 월명암에 「부설전」이 전한다. 내용의 기록은 전라북도 문화관광정보[http://www.gojb.net]의 전통문화 항목에 실려 있는데, 이는 김제시 문화관광과에서 제공한 정보이다.

    내용

    650년(백제 의자왕 10) 무렵 고현에 성은 구()씨요, 이름은 무원()이라는 불교 신자가 살고 있었다. 늦게야 딸 하나를 낳았으니 무남독녀라 금지옥엽이요, 이름은 묘화라 불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을 못하는 천성의 벙어리였다. 이로 인하여 구씨 내외는 그를 몹시 한탄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전설에는 이 소녀가 부처님 곁에 피었던 연꽃을 꺾은 죄 값으로 이승에 벙어리가 되어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묘화는 자랄수록 얼굴은 백옥 같고 자태는 부용[연꽃]같으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비록 말은 못하나 선녀같이 아름다운 묘화를 본 총각들은 앞을 다투어 청혼하였으나 묘화는 모두 거절하였다.

    묘화의 나이 20세 되던 어느 봄날 먹장삼을 입고 배낭을 멘 수도스님 세 분이 탁발 걸음으로 이 마을에 당도하여 묘화의 집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로 스님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머물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부설, 영희(), 영조()라는 수도자들이었다. 해가 저물었으나 비는 개지 않고 계속 내려 부득이 이곳 구무원의 신세를 지기로 하고 행장을 풀었다.

    그날 밤 구무원의 집에는 큰 경사가 났다. 요조숙녀로 곱게 자라면서도 말을 못하던 묘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어 입을 모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묘화는 말하기를, “부설 스님과 소녀는 전생에도 인연이 있었고 금생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를 따를 것이 바로 불법이라 하겠습니다. 소녀 삼생연분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 스님을 남편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일장설화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구무원과 그 부인도 20년이란 세월을 말을 못하다가 하게 된 것도 기특하지만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는 데는 입만 딱 벌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삼생연분을 만났으니 부도를 다하겠다는 묘화를 감히 말릴 수가 없었다. 부설 스님도 자작자수()와 인()으로 하여금 과()가 따르는 법이며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생후 20년간 말을 안했던 묘화를 차마 뿌리칠 수 없어서 두 도반()을 작별하니 영희, 영조 두 스님은 오대산() 문수도량()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고 부설 스님은 거사라 자칭하고 묘화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부설거사의 성은 진()씨요 이름은 광세()라 불국사 원부선사()에게 득도하니 법명이 부설이요 자는 의상()이다.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등운()이요 딸은 월명()이었다. 남매가 장성하자 거사는 병이 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 서해백강(西) 변에 초려를 지으니 이곳이 망해()이다. 이곳에서 석가세존의 ‘일좌부동경()’ 6년과 달마대사()의 9년 면벽을 본받아 심공을 잠수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옛날 친우인 영희, 영조 두 대사가 참례를 마치고 사능해안() 망해를 찾아와 희롱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3인이 공부의 성숙을 시험하여 보자.”고 하였다. 낙수 병 3개를 처마에 높이 달고 세 명이 지팡이로 일시에 때리자 하니 두 대사가 이에 응낙하고 때렸는데 두 개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버렸다. 그러나 부설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졌어도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부설거사는 청천백일에 풍운조화를 부려 때 아닌 비비백설을 내리게 하였으나 일편의 눈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신통한 도술을 부렸다고 한다. 거사가 두 대사에게 말하기를, 생사를 따라 윤회천류한 범부()는 병이 깨지면서 쏟아진 것과 같이 진성이 본래 영명하야 항시 머물고 있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병이 깨어져도 물은 공중에 매달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영희, 영조 두 대사는 부설 앞에 예배하고 견성()하였음을 흠모하며 법설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은 등운과 월명 두 자녀를 출가위승()하게 하고 두 자녀를 위하여 지금의 부안에 있는 등운암과 월명암을 지었으니 부설과 묘화의 유적이라 하겠다.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의 주요 모티프는 ‘삼생연분을 만나 말을 하는 부부가 된 묘화’, ‘망해에서 도를 닦아 정진한 부설’ 등이다. 이는 불심이 강한 부설이 수도의 길을 가던 도중에 묘화를 만나 자비보살의 심정으로 속세에 머무르며 도를 닦았던 부설거사의 이야기로서, 반드시 속세를 벗어나야만 도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머물러도 도를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재가성도담이다.

     

     

    월명암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항정경 을 읽고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다

    (매창의 시)

     

     

     

     

     

     

     

     

     

     

     

     

     

    '사찰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변산 내소사  (0) 2015.12.01
    능가산 내소사  (0) 2015.11.30
    불국사 가을 풍경  (0) 2015.11.18
    불국사의 가을  (0) 2015.11.18
    불국사의 가을 정취  (0) 2015.11.1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