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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국사의 가을 풍경
    사찰 풍경 2015. 11. 17. 22:14

     

    진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진아에 도달한다는 그런 것은 없다.

    만약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면 진아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획득해야 할 대상 이라는 의미다.

    새롭게 획득한 것은 결국 잃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 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


    진아는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곧 진아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진정,그대는 그대의 지복에 가득 찬 상태를 모르고 있다.

    무지함이 계속 나타나서 지복이라는 본질을 가진

    순수한 진아 위에 막을 드리우고 있다.


    이 무지의 막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무지란 진아를 육체, 또는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 그릇된 동일시가 사라지면 진아만이 남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것은 구도자을 차별하지 않는다.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바로 장애다.

    그 장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라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이 남아 있는 한,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진아 아닌 것>을

    진아와 잘못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아 아닌 것>이 사라지면 진아만이 남는다.

    놓여 있는 물건들을 치우기만 하면 빈 공간은 그냥 나타난다.

    그 빈 공간은 다른 곳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다.

     

     

    해탈(Mukti)의 허실(虛實)


    해탈이란 미래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영원히 존재 하고 있다.

    진아의 체험은 지금 여기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진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실체가 행복이며 행복이 실체다. 또한 진아가 곧 자유이다.

    해탈 이라는 말은 매우 혼동을 일으킨다.

    왜 해탈을 추구 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구속이 있고 그래서 자유를 찾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구속이란 없으며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왜 억지로 이름을 만들어 내서 그 이름을 추구하고 있는가?

    바로 그 무지만 없애면 된다.

    해탈이란 구속으로 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현재 구속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실 구속은 없으며 따라서 해탈도 없다.

     

     

     

    섬광으로 체험하는 우주의식이란?


    그 체험은 번뜩 나타났다가는 그냥 사라져 버린다.

    시작이 있는 것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항상 존재하고 있는 의식을 깨달았을 때에만

    깨달음이 영원하며, 그 의식은

    진정 언제나 우리들안에 존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깊이 잠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깨어나면 다시

    정신을 차리지만, 깊이 잠든 사람이나 깨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이며

    사람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깨어 있을때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으나

    깊이 잠이 들었을 때는 이 의식이 없다. 

    차이점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에 있을 뿐,

    본래의 의식 자체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육체와 육체에 대한 의식은 같이 나타났다 가는

    같이 사라진다.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으나

    깨어 있을 때는 제약이 있으며 이러한 제약이 바로 구속이다.


    문제는 바로 <육체가 곧 나>라는 느낌이며,

    이 그릇된 <나>라는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나>는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으며 다시 사라지지도 않는다.

    실체라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며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라면 결국 사라질 것이다.


    깊이 잠든 때와 깨어 있을 때를 비교해 보라.

    전자에서는 육체가 사라졌다가 후자에서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육체는 실체가 아니다.


    <육체가 곧 나>라는 그릇된 생각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이 그릇된 생각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드러난다.

    깨달음이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질이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릇된 것들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자연히 드러날 뿐이다.

    궁극적인 진리는 극히 단순 하다.

    그것은 원래대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이 이상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좋은 벗

    어느 사람이 부처님께 물었다.


    "어떤 사람이 객지에서 가장 좋은 벗입니까.?"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친절히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집안에서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정숙하고 어진 아내는 집안의 가장 좋은 벗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일가친척이니라."


    "그렇다면 미래의 가장 좋은 벗은 누구입니까?."
    "평소에 닦은 선행이 미래의 가장 좋은 벗이니라."


    - 잠아함경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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