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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마음은 본디 부처이기 때문에
항상 잊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면
금생과 내생에 반드시 부처를 볼 수 있으리.
若衆生心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 [능엄경]
깨어있는 마음과 가없는 마음만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불을 완전히 꺼
괴로움 한 가운데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한다.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써,
바로 불성(佛性),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 만유(萬有)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 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청화스님 어록]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지키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 또는 사람에게 끝없는 자비심을 베풀어라.
[잡아함경]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이 삿(邪)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마음이 음탕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으며,
생각이 약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생각이 부귀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또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에 항상 죽는 것을 근심함이요,
마음에서 나쁜 짓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요. 반드시 마음을 살핌이요,
마음이 사람을 따르게 하되
사람이 마음을 따르게 하지 말라.
마음은 사람을 그릇되게 만들며, 마음은 몸을 죽이며,
마음이 아라한도 되고, 마음이 하늘도 되고,
마음이 사람도 되며,
마음이 축생, 벌레, 개미, 새, 짐승도 되고,
마음이 지옥도 되고, 마음이 아귀도 되나니,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가 지금 부처가 되어 하늘에서나 인간에게서
공경을 받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반니원경]
대저 부처라 법이라 천당이라 극락이라
지옥이라 축생이라 아귀라 하는 것을
어찌 다른 곳에 나아가서 찾기를 구하리오.
사람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내 마음에 모두 있는 것이니
이 마음밖에 또 다시 구할 것이 없기에
부처와 부처님이 이 마음을 깨달아 아시고
중생에게 보이시건만,
중생은 이 마음을 잘 알지 못하여
중생수(衆生壽)에 있어서 닦기를 힘쓰지 않는 고로
혹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하늘과 인간 사람과
수라에 돌아다녀 가고오고 하나니,
이 마음을 잘 닦으면
부처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법이니라.
불법(佛法)은 공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다만 '깨어있는 마음智慧과 가없는 마음慈悲‘으로 매순간
行住坐臥語黙動靜 마음을 지켜봄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활안스님 어록]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법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 하나를 놓자 다른 하나를 잡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앞생각과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 없다.
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로 빠른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항복 받아서
착한 길로 나아가도록 공부해야 한다.
[중일아함경]
모든 중생(衆生)의 세계는 모두가 삼세(三世) 안에 있고
삼세의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 중에 있으니
모든 온(蘊)은 업(業)이 근본이요,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꼭두각시와 같으며 세간(世間)도 그러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과는 서로 차별이 없으며
서로 다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모든 세간을 짓는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성품을 알게 되며,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보아야 합니다.
[화엄경]
세상은 객관적으로 내 앞에 놓여 있는 의식의 실재적 대상
이 아니라, 마음의 욕망이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사이버
cyber 시공時空의 코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대상이 아니고 중생들이 제각각 그리고 있는 상상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복락의 시공으로 바꾸고 싶으면
세상을 복락의 욕심으로 지배하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을
보는 마음을 소유所有에서 존재存在로 전환해야 합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방법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바,
이런 마음의 전환을 존재론적 혁명이라 부릅니다.
무욕無欲은 소유론적 욕망을 존재론적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지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욕계欲界에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한 요
구입니다. 무욕은 소유론적 무의식적 욕망을 존재론적 무의
식적 욕망으로 방향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바깥의 것을 쟁취하겠다는 소유의 욕망을 내
마음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어,
이웃이나 심지어 무정중생無情衆生들에게까지 나누어
주려는 마음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그것이 곧 대승大乘
입니다.
존재의 욕망은 자비慈悲를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원효의 대승철학]
모든 중생의 마음 성품이
본래 깨끗함을 아는 것을 사랑(慈)이라 하고,
온갖 것은 평등하기가
허공 같다고 보는 것을 슬픔(悲)이라 하며,
온갖 기쁨을 끊는 것을
기쁜 마음(喜)이라 하고,
온갖 행을 멀리함을
버린 마음(捨)이라 하며,
모든 법은 미래 세상에는 깨끗하고
과거에는 갖가지며,
현재에는 '나'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이러한 법을 진실로 관찰하여 분명히 안다면
이것을 보리심(菩提心)을 뚫는 것이라 하나니,
보살이 이 모든 법을 관찰하고 나서는
차례로 온갖 법 자재(自在)로운 다라니를 얻느니라.
[대방등대집경]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깨어있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가없는 마음)입니다.
즉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暝想)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납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밝혀야 합니다.
[법정스님 어록]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如意寶珠)보다 귀한
생명가진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내가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게 하소서.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희망을 심어 주었던 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은혜와 기쁨 베풀게 하시고
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은밀히 짊어지게 하소서.
여덟 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
모든 것이 때 묻지 않게 하시고,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
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달라이라마 어록]
대자비(大慈悲)를 갖는 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단순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대자비는
이기주의나 편협한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계속 깨우친다......
시기심과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욕망을 던져버려라.
대신 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라.
친절한 마음과 용기,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환영하라.....
솔직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뿐 아니라
오른손도 모르게 할 때, 그때야말로
그 선함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 어록]
무(無)도 죽고, 침묵도 죽고,
무한자(無限者)마저도 죽지만
참으로 님[佛性]을 사랑하는 이는 죽는 걸 모른다.
그대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무(無)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공(空)과 무(無)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떨어져 있는 존재다.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아직까지 공(空)은 자각과 지각의 '대상'이다.
자신이 무(無)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놈은 누구인가 ?
이러한 경지를 체험한 놈은 누구인가 ?
'나'가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
아직도 이중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중성이 있는 한, 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사랑[慈悲]만이 죽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는 먼저 '사랑하는 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진실한 사랑이 우러나온다.
자신도 신[佛性]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는 순간에
참된 사랑[慈悲]은 태어난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지구와 우주가 서로 의존하면서 무아(無我) 로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의 도리가 펼쳐지는 자리
는 모든 존재가 무(無)로 비워지는 자리입니다.
연기세계의 참 모습은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싫다 같은 상대
적인 세계와 모든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떠나 있기에 중도(中道) 라고도 합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 연기법이라는 사실에 명확히 눈 뜨게 되면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천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연기적 깨침이란,
'나'와 '남'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온갖 겉모양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금강경]
눈(眼)은 생길 때에도 온 곳이 없고, 멸할 때에도 간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겼다가는
다 소멸하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지은 자가 없느니라.
이 쌓임이 소멸 하고 나면 다른 쌓임이 이어 받나니 세속의
범주와는 다르다. 귀, 코, 혀, 몸, 뜻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세속의 범주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위가 있고, 행위를 인연하여 의식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위가 없고, 행위가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도 소멸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第一義空經이라 한다.
[잡아함경]
진여(眞如) 또는 진리란
우주의 생명 그대로의
여실하고 참다운 이치를 말합니다.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진여는
그냥 보통 이치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동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도 합니다.
진여불성이라는 것은 시간적으로 봐서
한도 끝도 없이 유구한 생명체이고,
거기에 들어 있는 공덕으로 봐서는
만공덕(滿功德)의 자리입니다.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
자비로운 기운, 지혜로운 기운,
모두를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공덕이 들어 있는 자리가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진여불성, 이것은 바로 우주의 생명이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세한 것 속에도 다 들어 있습니다.
[청화스님 어록]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꿈같고 그림자 같고
꼭두각시 같고 거품 같으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이러한 것임을 관찰하여라.
一切 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이니 應作如是觀이니라.
금강경
모든 중생들에게 한없이 오랜 과거로부터
나고 죽음이 계속되는 것은
항상 머무르는 참마음(佛性)의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허망한 생각이 작용하는 탓이니,
이 허망한 생각은 참되지 못하므로
나고 죽는 세계를 윤회(輪廻)하는 것이다.
[능엄경]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인연으로 모든 중생들이 허망한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아견(我見:我相)을 가진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무시이래로 계교와 집착을 일으켜서
남과 나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은 중생이 허망한 윤회를 받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최상의
적정법(寂靜法)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삼업(三業)을 경계하여 깨치지 못하고,
몸과 입과 뜻을 방자하게 하여 뭇 번뇌로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업을 짓는 까닭이다."
[문수사리문법경]
인간의 삶을 비롯한 세상의 물질이나 현상, 즉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더라도 그냥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이 끓어 수증기로 증발했다고 해서 물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물은 수증기로 변할 것이고, 또 그것들은 우주 공간
어딘가에 다시 모여 구름이나 비, 눈, 안개 등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순환(輪廻)하는 것이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코 근본 자기면목(自己面目:佛性)을
찾아야만 합니다.
서암스님 어록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선에서 시작하여 인자하고 효도하여
즐거운 곳에서 즐거운 데로 들어가고
밝음에서 밝은 곳으로 들어간다.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고
괴로움에서 괴로운 데로 들어가고
어둠에서 어둠으로 들어간다.
이 이치를 누가 잘 알겠느냐.
오직 부처님만이 보고 알아서 사람을 가르치지만
믿는 이가 적어서 나고 죽음이 그치지 않고
악취(惡趣)가 지속되는 것이다.
[무량청정평등각경]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실상이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생명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생명 자체도 광명으로 충만해 있고,
천지우주도 바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은 둘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꼭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청화스님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