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유서 깊은 사찰 함월산 기림사입니다.
유서깊고 고풍스런 사찰 기림사 풍경이 기픔이 있는 풍경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로 불국사의
말사입니다.
'안락국전'이나
'안락국태자경' , '기림사사적기'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천축(天竺)의 범마라국 승려 광유(光有)성인께서 제자 안락국(極樂國) 으로 하여금
해동의 '신령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靈龜飮水'의 길지에 임정사(林井寺)를 창건하시고 오정수五淨水를 길어 차茶를 달여 부처님전에 공양
올리고, 왕생게를 외우며 수행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원효스님의 중창 이전(서력643년)에 이미 해로를 통해 천축으로부터 불교가 직접 전래되었다는 근거이자 신라시대 이미 기림사에 차가 들여와
재배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서력
643년(선덕여왕 12) 원효(元曉)성사께서 확장, 중수하시고 祇林寺로 개칭하였으니 이는 세존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고 많은 중요한
법을 설해 주신 '기원정사'의 기원, 즉 '기림'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니다. 이후로도 고려조에는 당시 대선사 각유선사께서 머무셨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승병들의 훈련 주둔지-'鎭南樓'로서 기능하는 등 일제강점기까지 근역의 가장 큰 본산이었습니다.
현재는 불국사의 수말사이자 교육도량으로서 '금강학림'과 '불국율원'을 통해 청정하고 역량있는 승려를
배출하여 한국 불교 중흥을 도모하고 있는 도량입니다. 또한 이천 여를 이어 온 '신라 차' 문화를 발굴하고 계승하는 신라차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진 것을,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들입니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 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존되었습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습니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토함산 동쪽에 위치한 기림사 대적광전(보물833호)이다.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으로 기림사의
주불전이다. 삼국시대 기림사가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수리를 거듭한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629년(인조7)에 크게 중수하였다고 한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신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958호)과 뒷편 탱화인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1611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새겨 넣었다고 하며, 옛모습이 손상되지 않은채 보존되고 있어 건축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지만 낮은 기단에 건물을 세워 웅장하지만 위압감을 주지는 않고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경주 기림사는 삼국시대 때 인도 승려가 창건한 사찰로 원효대사가 중창하면서 기림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산중사찰로 조선후기에는 경주지역에서 중심이 되었던 사찰이다. 한때는 불국사가 기림사에 속한 말사였다. 문화재로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958호)과 비로자나삼불회도(보물1611호), 목탑지 등이 있다.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 보물833호, 조선후기, 경북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신라 선억여왕 12년(643)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조선
인조7년(1739)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철종13년(1862)에는 큰불이 일어났으나 대적광전만은 화를 면하였고, 1878년과
1905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은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답게 크고 웅장하며, 비교적 넓은 공간인 안쪽은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건물은 산사(山寺)의 건물들이 주 칸은 좁고, 기둥은 높은 성향을 지닌 것과는 구별된다. 견실한 구조와 장엄한 공간구성이 돋보이며, 옛 모습을
보존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불당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문화재청>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을 말하며.중국에서 뜻으로 옮겨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썼는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관세음은 구역이며 관자재는 신역인데, 산스크리트 '아바로키테슈바라', 곧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본다면 관자재가 그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관세음보살로 신앙되어 왔으며
관음보살이라 약칭하였다.그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관음보문품(觀音普門品) 또는 관음경(觀音經)이라 일컫는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결국 뜻으로 보면 관세음이나 관자재는 같으며 물론
그 원래의 이름 자체가 하나이다.보살(bodhisattva)은
세간과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성자(聖者)이므로 이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大悲聖者]이라고도 한다.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락산(補陀落山)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보타락산은 팔각형의 산으로, 산에서 자라는 꽃과 흐르는 물은 빛과 향기를 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이곳에는 단독으로 천수관음보살상(千手觀音菩薩像)을 조성하였지만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나타나기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 대세지보살과 함께 있기도 한다.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등의 형태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선덕여왕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기림사의 응진전이다. 막돌 장대석 외벌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을
꾸몄는데, 응진전 건물로서는 다소 규모가 크다. 배면과 양 측면 쪽에 불단을 배설(配設)하였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전면만 매칸
쌍여닫이 이분합 교살문을 달았다.
전후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고 측면 간주는 방주를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1본을 제외하고 모두 동바리이음을
하였다. 공포양식은 다포계열로 내외2출목형식에 주간포는 매칸 1구씩을 갖추고 있다. 주두와 소로는 굽면이 사면이며 굽받침은 없다. 살미첨차는
외부에서는 앙서이나 내부 초제공에서는 교두형이고 나머지는 초각하였다. 공포의 세부기법은 2제공이 중복되고 쇠서 곡선은 과장되지 않게 휘어오른
기법을 보이고 있으나 사우(四隅)의 귀포에만 연봉이 조각된 다른 모양의 쇠서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살미를 얹었는데 어칸과 협칸에는
봉두를 얹었으나 어칸에는 삼분두한 살미를 얹어 보아지를 삼았다. 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를 공포위에 얹은 다음 화반형의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게하고 파련대공을 세워 종보를 받도록 하였다. 천장은 빗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지붕은 맞배형 겹처마로 양쪽에 풍판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후기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 수평적 느낌이 강한 단아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림사 약사전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대적광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중건기(重建記)에는 1654년(효종 5) 3중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678년(숙종 4)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따라서 약사전은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얕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평면을 앉혔다. 우물마루를 깔고
전통칸으로 하여 어칸 후편벽에 기대어 불단을 마련하였다. 기둥은 흘림이 약한 원주를 세우고 정면은 궁판을 끼운 쌍여닫이 교살문을 세웠다. 그리고
좌협칸 뒷벽에 외여닫이 골판문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측면에 출입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여기서는 배면에 둔 것이 이색적이다.
주상에
평방을 얹은 다포양식이다. 주간포는 1구씩을 넣었고 맞배지붕인 까닭에 측면에는 포작을 설치하지 않았다. 포작은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결조하였고, 살미는 3제공에 외측에는 봉두를 얹었다. 살미의 끝은 사절된 앙서형으로 상부에 연화를 얹었다. 내부쪽으로는 3출목으로 결조된 까닭에
규모에 비해 조금 과장되게 중도리 가까이 내밀었다. 천장은 빗반자, 소란반자, 우물반자로 조합·구성되었고 어칸을 협칸보다 한단 높게 하여
소란반자로 꾸몄다. 양협칸은 우물반자로 처리하면서 외목도리와 중도리 사이는 경사면을 따라 빗반자로 마감하고 별지화를 시채(施彩)하였으며, 좌측벽
내측으로 별지화를 시채하였다. 우측벽에도 동일한 벽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근년에 보수하면서 상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겹처마 맞배집으로
옥개부분을 구성하였다. 전체적으로 하부구조와 어울리게 적당한 균제로 처마를 내밀었다. 전체적으로 곡선적인 느낌이 드는 균제미(均齊美)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좌측의 대적광전과 유사한 치목수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