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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통일 약사 여래 대불사찰 풍경 2017. 1. 9. 23:34
팔공산 동화사에 조성된 통일을 염원하여 조성된 통일 약사 여래 대불입니다.
팔공산 동화사 남쪽 산자락에 1만여 평의 대도량(大道場)을 조성하고, 좌대(座臺) 높이 13m를 포함하여 30m 높이의 석불이다. 2,000t에 달하는불상과 3,000t 무게의 좌대석은 전북 익산(益山)의 황등석(黃橙石)을 썼으며, 108명의 석공들이 약 7개월 동안 만들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조언을 거쳐 조성되어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도량에 오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였고, 석불 맞은쪽에는 약사여래 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이 조성되었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건평 1,200평의 규모이다. 1992년 11월 27일 대불의 점안식(點眼式)이 있었다.
약사여래대불
- 좌대높이 : 13m, 전체높이 : 33m
- 불상원석 : 2천톤, 좌대원석 : 3천톤 (전북 익산군 황동석)
약사여래대불(藥師如來大佛)은 칠천만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인류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조성한 팔공총림 동화사의 대표 불상이다. 전체 높이가 33m에 이르러 석조 불상으로는 세계최대의 규모이다. 1990년 10월 26일 착공하여 1992년 11월 27일 점안대법회를 봉행하였다.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부악(父岳)으로 추앙받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약사신앙의 중심지로서, 팔공산 곳곳에는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으면서 열두 가지 큰 원(十二大願)을 세워 성취하고, 중생의 고통과 일체 병자가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며, 그 이상세계는 유리처럼 청정한 동방만월세계(東方滿月世界)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대규모 불사의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약사대불의 본원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고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여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있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최대의 삼층석탑(높이 17m, 원석 2천톤) 2기, 석등(높이 7.6m) 2기가 있고, 뒤로는 호법신장과 금강역사가 병풍처럼 조성되어 있다. 앞에는 통일기원대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통유리를 통해 약사여래대불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약사여래대불 지하에는 불교문화관(국제관광선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약사여래불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藥王)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웠다.
그 대원은 ①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가득하게 하려는 원, ②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③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결핍하지 않게 하려는 원, ④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大乘敎)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업(業)을 지어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갖추게 하려는 원, ⑥ 일체의 불구자로 하여금 모든 기관을 완전하게 하려는 원이 있다.
또 ⑦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무상보리를 증득하게 하려는 원, ⑧ 일체 여인으로 하여금 모두 남자가 되게 하려는 원, ⑨ 천마(天魔)·외도(外道)의 나쁜 소견을 없애고 부처님의 바른 지견(知見)으로 포섭하려는 원, ⑩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⑪ 일체중생의 기갈을 면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려는 원, ⑫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훌륭한 옷을 갖게 하려는 원 등이다.
이것이 약사십이대원(藥師十二大願)이며,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고 또 한량없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것이다. 이 십이대원 속에는 약사여래가 단순히 중생의 병고를 구제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복이나 음식 등의 의식주문제는 물론 사도나 외도에 빠진 자, 파계자, 범법자 등의 구제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십이대원 이외에도 극락왕생을 원하는 자, 악귀를 물리쳐서 횡사를 면하고 싶은 자,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자들이 약사여래의 명호를 부르면서 발원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외적의 침입과 내란, 성수(星宿)의 괴변, 일월(日月)의 괴변, 때아닌 비바람, 가뭄, 질병의 유행 등 국가가 큰 재난에 처했을 때도 약사여래의 본원력을 통하여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본원공덕경≫에 근거하여 약사여래를 신봉하는 약사신앙은 우리 나라의 고대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신앙형태였다.
그의 이름을 외우고 그의 가호(加護)를 빌면 모든 재액이 소멸되고 질병이 낫게 된다는 실리적인 신앙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졌다. 삼국의 전쟁중 수많은 희생자와 병자를 냈던 상황 속에서 약사여래는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이 병에 걸려 의약의 효험이 없었을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여왕의 침전 밖에서 ≪약사경≫을 염송하여 병을 낫게 했다는 것 또한 약사신앙 유포의 중요한 일면이다.
통일 후의 신라에서는 ≪약사경≫에 대한 연구가 경흥(憬興)과 태현(太賢) 등의 고승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고, 약사여래의 조성이 매우 많았다. 특히, 신라 사방불(四方佛)의 조성에 있어 동방에는 항상 약사여래를 모시는 것이 일정한 신앙 유형으로까지 발전된 사실은 약사신앙이 널리 대중화되었음을 여실히 밝혀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개인의 평안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약사도량(藥師道場)이 자주 개설되었는데, 이 또한 약사의 명호를 외우면 국가의 재난이 소멸된다는 약사여래의 본원에 근거를 둔 것이다. 대표적인 약사행법은 7일 동안 팔재계(八齋戒)를 지키면서 주야 6시로 약사여래를 예배, 공양함과 아울러 ≪약사경≫을 49번 독송하고 49등(燈)을 밝히는 것이다.
또 약사여래상 7구를 조성해서 그 상 앞에 각기 49일 동안 7개의 등을 밝히고 5색 당번(幢幡)을 49척쯤 되게 만들어 걸고 여러 종류의 중생을 방생하면 여러 가지 질병의 위험을 면한다고 한다. 국왕이 그 나라에 유행하는 질병이나 외적의 침입 등 재난이 있을 때도 위와 같이 행하면 재난이 소멸되고 국토가 평안해진다고 한다.
또, 선남선녀가 약사여래상을 조석으로 모시어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면 장수하게 됨은 물론 부귀와 관위(官位)를 얻게 된다고 한다. 현재 우리 나라 사찰에는 이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을 부속시키고 있어 약사신앙의 통속성을 대변하고 있다.
욕심과 번뇌를 여윈 이는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
(제법집요경)
선지식을 구하면 사견에 떨어지지 않으려니와
만일 구하는 바에 따로 미움과 사랑을 일으키면
곧 능히 청정한 깨달음에 들지 못하리라.
(원각경)
지금 이대로의 내가 되기를 선택하라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비교는 지금 이대로의 나를 거부하는 것이고,
남들의 삶을 기웃거리는 수동적이고 힘 빠지는 일이다.
타인과 비교 없이, 지금 이대로의 주어진 내가 되기를 선택하라.
현실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름대로 고민과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SNS라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행복해 보인다. 누가 더 많은 볼거리와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나 내기라도 하듯, 그래서 그 행복의 한가운데에서 인증샷 남기기 내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러다 보니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곤 한다. 나만 우울하게 사는 것 같아 외로워진다. 그러나 이런 모습 들은 진짜 모습이 아니라 단지 ‘ 잘 보이고 싶은 아상’이기 쉽다. 그러니 상대방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할 것은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남들이 한다고 나도 따라 할 필요도 없고, 상대방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삶을 살아 나간다. 비교 우위를 행복이라 여기고, 비교 열등을 불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그 어떤 판단도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SNS처럼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비교는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고, 남들의 삶을 기웃거리는 수동적이고 힘 빠지는 일이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하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깨달음은 나는 부족하다거나, 더 나아지면 좋겠다는 식의 생각 없이 지금 이 순간 주어진 내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법상스님 저서, <내 안에 삶의 나침반이 있다> 중에서 - 아름다운 인연 출판사인자하면 마음에 혼란이 없으니 자비가 제일가는 행이다.
보살은 자비의 행으로 중생을 보살피니 그 복은 한량이 없다.
(법구경)
부처님은 누구신가
/자이나교도 우빨리의 개종/
| 맛지마 니까야: 56 우빨리 경 5-30 |
(우빨리 장자가 부처님을 논박하러 가다)
그래서 장자 우빨리는 빠와리까의 망고 숲으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그는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에 앉아서 따빳시와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질문한 후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님, 니간타 디가 따빳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잘 배운 제자로서 부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행동의 잘못이 큰 것에 비하면 생각의 잘못은 하찮은 것입니다. 반대로 행동의 잘못은 악업을 짓고 악행을 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며, 말의 잘못이나 생각의 잘못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자여, 그대가 만일 진리에 근거해서 토론을 한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소.”
“존자님, 진리에 근거해서 토론을 하겠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좀 대화를 하도록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니간타가 중병이 들어서 괴로워하는데 그는 찬물을 거절하고 오직 더운물만 취한다고 합시다. 그가 만약 찬물을 얻지 못하면 그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 태어난다고 니간타 나따뿟따는 말합니까?”
“존자님, 그는 ‘집착된 마음’ 이라는 신의 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었을 때 마음이 집착되어 [*생각의 잘못에 해당됨] 그때까지도 묶여 있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장자여, 그대가 대답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시오. 먼저 말한 것과 나중에 말한 것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대는 진리에 근거해서 토론하고 대화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존자님이 그렇게 말하셔도 행동의 잘못은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며, 말의 잘못이나 생각의 잘못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자여, 여기 어떤 니간타가 ‘네 가지 조심’으로 자신을 절제한다고 합시다. 그는 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 온전히 절제를 합니다. 그는 모든 악을 쫓아버리는 데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모든 악을 떨쳐버립니다. 그는 모든 악을 떨쳐버리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다니는 동안 많은 조그만 생물들을 죽입니다. 이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그에게 어떤 과보를 말합니까?”
“니간타 나따뿟따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비난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합니다.”
“장자여,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그러면 비난의 대상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의도적이라면 크게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존자여.”
“그러면 의도적이란 것은 행동, 말, 생각의 잘못 중 어느 것에 속합니까?”
“생각의 잘못에 속합니다. 존자님.”
“장자여 그대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시오. 먼저 말한 것과 나중에 말한 것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대는 진리에 근거해서 토론하고 대화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수천리를 떠나 있더라도 내 계율을 항상 생각하면 반드시 도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항상 내 좌우에 붙어 있더라도 내 계율을 따르지 않으면 마침내 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십이장경)
만일 조금 들어 아는 것 있다 하여
스스로 대단한 체하며 남에게 교만하게 굴면
마치 장님이 촛불을 잡은 것 같아
남은 비추어 주면서 자신은 밝히지 못한다.
(법구경)
무상하여 정해진 기약도 없지만 죽음이란 원수는 늘 따르며
엿보므로 나는 지금 이 순간 진리를 구하기로 결정한다네
(불소행찬)
부처님의 경전을 전하는 것은 세상을 크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경전을 전해 받는 사람은 큰 경사를 얻고
일체 중생은 윤택함을 얻는다.
(불본행경)
하늘에서 보석비가 쏟아져도 욕심 많은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른다.
욕심은 괴로움만 줄뿐 즐거움을 모르나니 슬기로운 이는
먼저 욕심을 버리느니라.
(중아함경)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지혜가 생길 것이요,
마음에 지혜가 생기면 곧 깨달음이 생길 것이다.
(불반니원경)
한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만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
한 법당이 이룩되면 곧 극락세계가 사바세계 안에 이루어진다.
(무량수경)
부처님은 누구신가
/자이나교도 우빨리의 개종/
| 맛지마 니까야: 56 우빨리 경 5-30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날란다의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계셨다.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많은 니간타 무리들과 함께 날란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는 발라까에서 온 많은 재가신도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우빨리였다. 그들은 디가따빳시로부터 부처님과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다. 이에 니간타 나따뿟따는 말하였다.
“훌륭하다, 따빳시, 그대는 스승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잘 배운 제자로서 사문 고따마에게 대답했다. 행동의 잘못이 큰 것에 비하면 생각의 잘못은 얼마나 하찮은가! 반대로 행동의 잘못은 악업을 짓고 악행을 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며, 말이 잘못이나 생각의 잘못은 그렇지 않다.”
이에 장자 우빨리는 니간타 나따뿟따의 말에 동의하면서 말하였다.
“존자님, 제가 가서 이 논쟁점에 대하여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겠습니다.”
“가시오, 장자여, 이 논쟁점에 대하여 사문 고따마의 교리를 논박하시오. 나와 디가 따빳시 또는 그대도 사문 고따마의 교리를 논박할 수 있소.”
이에 니간타 디가 따빳시는 니간타 나따뿟따에게 말하였다.
“존자님,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교리를 논박한다는 것이 제게는 탐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문 고따마는 마술사이고, ‘개종하는 마술’을 알고 있고 그 마술에 의하여 다른 교단의 제자들을 개종하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빳시, 우빨리 장자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장자여, 가서 논쟁점에 대하여 사문 고따마의 말을 논파하시오. 나와 디가 따빳시 또는 그대도 사문 고따마의 교리를 논박할 수 있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님.”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가지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지 않으며
전부 가난한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쓰겠습니다.
(승만경)
계율을 잘 지키고 마음의 동요가 없게 하라.
법을 깨달아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유행경)
마음이 세상을 유지하고 마음이 세상을 이끌고 간다.
마음이 하나의 법이 되어세상을 제어한다.
(잡아함경)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피곤한 이에게 길은 멀며,
어리석은 이에게 생사는 길고 오묘한 법을 듣기란 드문 일이로다.
(법집요송경)
긴 세월에 걸쳐 은혜와 사랑을 쌓아도 이별을 피할 수는 없다.
반드시 헤어지고 말 것이므로 해탈의 원인을 구하노라
(불소행찬)
맨 마지막 남은 한 덩이 밥이라도 자기가 먹지 않고 남에게 베풀되
터끝만큼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마라.
(증일아함경)
대규모 천도재와 초대형 괘불의 등장
<삼신불도> 괘불의 높이는 12.47미터이고 너비는 9.49미터로 장정 30명 이상이 동원되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큽니다.
이러한 초대형 괘불 탱화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세기 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괘불은 전란 때 사망한 전사자들을 비롯해 바다와 육지에서 희생된 뭇 영혼들을 위한 대규모 공동 천도재 때 사용됩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수천 수백 명의 영가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불단이 필요했습니다.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끊임없이 사찰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에 법당은 역부족이었습니다.이에 야외에 불단이 차려지고 십 리 밖 멀리에서도 볼 수 있는 초대형 크기의 괘불이 허공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법당이 좁아 대중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때, 야외에 단을 차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야단법석이라고 합니다.
강소연 강의록, <사찰불화 명작강의> 중에서 – 불광출판사맷돌이나 숫돌이 깍이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어느 땐가 다 닳아 없어지고
나무를 심으면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크게 자란다.
(선림보훈)
부처님은 누구신가
/부처님을 신뢰하는 이유/
| 맛지마 니까야: 27 쭐라핫티빠도빠마 경 1-8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브라흐민 자눗소니는 한 암말이 끄는 온통 하얀색의 수레를 타고 한낮에 사왓티를 나섰다. 그는 방랑 수행자 삘로띠까가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왓차야나여, 이 한낮에 어디서 오십니까?”
“선생님, 저는 지금 사문 고따마가 계신 곳에서 옵니다.”
“왓차야나님은 수행자 고따마의 지혜의 명석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지혜롭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 제가 누구기에 감히 사문 고따마가 지혜가 명석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사문 고따마와 동등한 자일 것입니다.”“왓차야나님은 정말 사문 고따마를 높이 찬탄하는군요.”
“선생님, 제가 누구기에 감히 사문 고따마를 찬탄하겠습니까? 사문 고따마는 신과 인간 가운데 으뜸으로써 칭찬받는 사람들에 의하여 칭찬을 받습니다.”
“무슨 이유를 보았기에 왓차야나님은 사문 고따마에게 그와 같은 깊은 신뢰심을 갖는 것입니까?”
“선생님, 마치 지혜로운 코끼리 사냥꾼이 숲에 들어가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코끼리 발자국을 보았다면, 이것은 커다란 숫 코끼리 발자국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내가 사문 고따마의 네 가지 자취를 보았을 때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세존이시다. 부처님에 의하여 담마는 잘 설해져 있고 승가는 올바른 길을 잘 실천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입니까? 저는 머리카락을 가를 만큼 그렇게 예리한 명사수처럼 논쟁에 있어 도사이고 영리하고 학식이 있는 귀족들을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날카로운 재치로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박살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닙니다. 그들은 사문 고따마가 어느 도시에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질문을 만듭니다. ‘사문 고따마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의 교리를 이렇게 반박하자.’ 라고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문 고따마가 이런이런 마을과 도시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으로 갔는데 사문 고따마는 그들에게 담마에 대하여 가르치고, 분발케 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듣고 난 후에 기쁘게 된 그들은 전혀 질문을 할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를 반박하겠습니까? 반대로 그 귀족들은 사문 고따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내가 이와 같은 사문 고따마의 첫 번째 자취[두 번째 자취는 브라흐민, 세 번째는 장자인데 이들도 부처님을 논박하려다 오히려 제자가 되었고, 네 번째 자취인 사문은 출가하게 됨]를 보았을 때,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세존이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고 승가는 바른 길을 잘 실천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방랑 수행자인 삘로띠까가 말을 마치자 브라흐민 자눗소니는 하얀 암말이 끄는 온통 흰색의 마차에서 내려, 한쪽 어깨에 웃옷을 걸치고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하여 합장하고 세 번 감탄의 말을 하였다.“부처님, 아라한,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아라한,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아라한,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언젠가 고따마 존자님을 만나서 그와 함께 대화할 수 있겠지.”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약사여래 통일 대불 지하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입니다.
- 사리(舍利)란 참된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구슬모양의 유골로서, 유신(遺身)ㆍ신골(身骨)이라고도 한다.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사리신앙이 더욱 신비화되어 둥근 구슬의 형태로 된 영골(靈骨)ㆍ영주(靈珠)로 인식되었다.
부처님의 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불경(佛經)을 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구분하고, 승사리를 봉안하는 곳은 부도(浮屠)라고 하여 뒤에 와서는 불탑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석가모니의 열반 뒤 그 제자들은 인도의 장례법에 의하여 유신을 다비하였더니 8곡 4두(八斛四斗)나 되는 많은 사리가 출현하여 이를 8국에 분배하여 봉안하였고, 그 뒤 아소카왕(阿育王) 때에는 팔만사천의 불사리탑을 건립하는 등 사리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다.- 사리친견 공덕
- 부처님 사리를 친견하는 것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광명경〉에 이르기를 “사리는 한량없는 육바라밀의 공덕과 수도의 결정체로 생기는 것으로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가는 복전(福田)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사리를 참배함으로써 숙세의 업장이 모두 소멸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사리불존자 사리
- 사리불존자란?
-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귀의한 인물 두 인물이 사리불과 목건련(目建連)입니다.
사리불은 산스크리트명은 샤리푸트라(Sariputra)로 샤리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하며 마갈타국 왕사성 북쪽 나라촌에서 출생하였고 이웃의 목건련과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중에서 큰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산자야(Sanjaya)의 문하로 출가하여 사문의 길을 걷게 된다.
얼마 안되어 이들은 산자야가 거느리고 있는 250명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나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 섰다.
그후 산자야와 결별하고 누구든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면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하고 다시 구도의 행각에 나섰다.
그러다가 사리불은 부처님께 최초로 귀의한 다섯제자 중의 한사람인 앗사지(Assaji,阿說示)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 하였다.
자기의 수행에 정진함과 동시에 다른이들의 교화에도 노력했다.
석존 교단 가운데 중요한 지위인 인물이며 부처님보다 먼저 나라카 마을에서 춘다의 간호 아래 열반에 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으며 부처님은 80세.
그의 유골이 부처님 곁으로 돌아오자 여러제자들과 더불어 부처님께서는 애닮아 하셨으며, 수닷타 장자는 탑을 세워 그의 유골을 안치하였다.
그로부터 200년 후 아쇼카왕은 기원정사에 들러 사리불의 탑에 공양하고 10만금을 희사하였다고 전한다.
석굴암의 입구에서 바라볼 때 우측의 첫번째가 사리불이요, 좌측의 첫번째가 목건련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사리불은 왼손으로 비구의 필수품인 정병(淨甁)을 왼편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려 간직하듯 들고 있는데 그 한 손가락에 조그마한 종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지물을 걸고 있으며, 오른 손은 엄지와 검지를 타원형으로 맞댄채 오른편 가슴에 대고 있는 모습으로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다.부처님 진혈사리
- 팔공총림 동화사에서는 야자조사원의 주지 와니타(Wannita) 스님이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진신사리, 부처님 진혈사리를 동화사 순례단에 전달했으며 앞의 두 사리는 인도 산치 대탑의 분과사리입니다.
인도 라즈기르 나란다 소재 박물관 소장이었던 스님이 귀국하면서 미얀마로 들여왔고 10년간 모셔왔던 사리를 동화사에 기증한 것이며 12월 1일 친견법회행사를 열고, 동화사 법화보궁에 모셔져 있습니다목건련존자 사리
- 목건련존자란?
- 목건련(神通第一目建連)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의 콜리타라는 마을의 한 부유한 브라만 사제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의 교단에 사리불과 함께 들어온 후 맹렬하게 수행한 결과 진리를 깨닫고 십대제자의 반열에 끼게 된다. 열명의 제자 중 목건련의 두드러진 특기는 신통력이었다.
그는 신통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날아 다니는 물체를 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목건련은 이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하여 포교와 부처님 교단 유지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오직 중생을 교화하는데만 신통력을 쓸 뿐 삿된 목적으로 악용한 적이 없었다.
목건련은 효성 또한 지극했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를 아귀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효자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우란분경]의 가르침으로 오늘날도 우리 사찰에서는 돌아가신 선조들을 천도하는 우란분재(盂蘭盆齋) 다른 말로 백중(百衆) 또는 백종(百鍾)이 열리게 되었다.
백중 혹은 백종이란 말은 100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려 저 세상으로 간 부모님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법회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목건련은 사리불과 더불어 부처님을 배반한 데바닷타의 무리 500명을 부처님 품안으로 귀의 시키는 등 부처님 법을 널리 펴는데 매진했다.
목건련은 불행하게도 포교의 길에 나서다 이교도에게 매를 맞아 순교한다.
사실 그는 과거에 그런 위기를 접하여 신통력으로 죽음을 모면했지만 두번째는 이것이 자신의 업인줄 알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목건련은 석굴암 좌측에 사리불과 마주한 채 커다란 메부리코에 고개를 약간 쳐든 연로한 비구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두 팔은 옷 속에 감싸여 있지만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한손으로는 향로 자루를 잡고 다른 손으로 향을 넣으면서 고요하게 사념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묵연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