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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달빛이 고요히 고요히 내려앉고
쌀쌀한 바람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가슴 여민다
세월은 이렇게 오고 또 가고
안거란 편히 머무는 것이라면
세상에 누가 있어 제대로 안거하고 있는가
다 벗은 나목의 회한으로
이 한겨울 화두 하나 눈썹에 걸고
꿈에라도 도솔천을 오르내린다
모든 바람은 지나가는 것인데
맨날 회오리 바람으로 만나는 너이고 보면
너란 경계가 늘 사랑으로
내키지 않더라도 보살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야 말 것이다
세상에 사랑하지 않는 생명이 하나도 없기를 기도한다
안거의 벽두에 바람과 함께 앉아
은산의 철벽을 오가며
생명 사랑 섬김의 화두란 망상을 되씹는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두손모은다
계사년 동안거 이틀째날
달빛좋은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불이사문 월암
어리석은 이는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으려 하지만
번뇌를 끊으려는 집착 때문에
오히려 열반을 얻지 못한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번뇌가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번뇌를 끊겠다는 생각조차 놓아버려
항상 열반에 머문다.
만약 열반을 얻으려는 사람이
삶을 죽음과 다르다고 보고,
번뇌를 열반과 다르게 본다면
그는 분별에 빠지고 만다.
번뇌를 열반과 다르다고 보지 않아야
열반에 들 수 있다.
- 달마대사 오성론(悟性論)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노사께서 법상에 올라 대중들에게 물으셨다.
선문에 이런 공안이 있다.
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성자도 많은데 이들은 말하기를 ?만물은 조물주가 있어서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니 만물은 결국 조물주인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만물을 조물주가 만들었다면 그 조물주는 누가 만들었는고? 이것을 대답할 수 있어야 참다운 종교요, 성자라 할 수 있다.
누가 일귀하처(一歸何處)의 소식을 일러 볼 사람 있는가?
不見一法見如來.
한 법도 보지 않아야 여래를 보리라.
옛날 조주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같은 질문을 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청주(靑州)에 있을 때 옷 한 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다.?
이 소식을 알아 듣겠는가?
靑州布衫重七斤
門前依舊桃千樹
청주의 베옷은 일곱 근이지만
문앞의 복숭아는 여전히 천 그루로다.
法無異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진리에는 진리 아닌 것이 없는데
망령되게 스스로 애착하네.
마음으로 마음을 쓰려하니
이보다 더한 잘못이 어디 있는가.성림당 월산 대종사 법어
<참다운 神通과 妙用>
三處傳心如何事
靈山會上擧拈花
多子塔前分半座
鶴林槨中示雙趺
삼처전심이란 어떤 일인가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임이요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나눠 앉음이요
학림의 관 속에서 두 발을 보임이라.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세 번이나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전한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이다. 첫번째는 영산회상에서 설법을 하다가 부처님이 꽃을 들었는데 이 소식을 안 가섭존자만이 혼자 빙그레 웃었다. 두번째는 다자탑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가섭존자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부처님이 가섭을 불러 당신이 앉은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게 했다. 세번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가섭존자가 임종을 못보고 늦게 도착했다. 그 때 부처님은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보였다. 이것이 바로 삼처전심이다.
선불후불(先佛後佛)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은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 선문(禪門)의 참다운 신통묘용(神通妙用)이다. 선문의 신통묘용이란 하늘을 날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둔갑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정법을 상전(相傳)하되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이는 오직 선문에만 있는 것이요 다른 종교나 학문에는 없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실로 묘한 것이어서 아는 사람만이 알 뿐,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다. 칼이 날카로운 것을 철부지 아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으니 그래서 고인은 ?여인음수 냉난자지(如人飮水 冷暖自知)?라 했다. 물을 마셔보아야 스스로 차고 더운 것을 알지 말로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맛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신통묘용이 통하는 것이니 제불제조(諸佛諸祖)가 서로 눈 한번 찡긋하면 알아차리고 인가를 하고 심인을 전하는 것은 다 이와 같은 묘용의 일이니라.
옛날 위산 영우(潙山靈祐)선사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제자 앙산(仰山)이 찾아왔다.
이를 본 앙산이 스승의 낮잠을 힐난했다.
"스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위산선사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내가 마침 묘한 꿈을 하나 꾸었네. 자네가 나에게 그 꿈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 않으려는가?"
앙산은 대답 대신 밖으로 나가더니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왔다.
"스님. 세수나 하시지요."
위산이 흡족해 하면서 세수를 하고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향엄(香嚴)이 들어왔다. 위산화상이 향엄에게 말했다.
"나는 아까 꿈을 꾸었고, 그 꿈 얘기를 앙산에게 한 뒤 문답을 마쳤다. 자네도 그것이 어떤 꿈이었는지 내게 한번 물어보지 않으려는가?"
향엄이 이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가더니 이번에는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와서 말했다.
"스님. 차나 한 잔 드시지요."
스님은 대단히 흡족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신통이 목련존자보다도 낫구나!"
그대들은 이 고화를 들으면서 신통묘용이 어떤 것인지 알았는가?
吾常呼汝汝斯應
汝或訊吾吾輒酬
莫道此間無佛法
從來不隔一絲頭
내가 너를 부르면 너는 응답하고
네가 나에게 물어오면 나는 응답했네.
이 사이에 불법이 없다 말하지 말라
실오라기 한 가닥도 가리지 않았도다.성림당 월산 대종사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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