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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산 송광사 풍경
    사찰 풍경 2013. 3. 29. 00:05

    2013년 3월 23일 찾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 풍경입니다.

    봄이오는 길목 송광사 앞을 흐르는 계곡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송광사의 건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송광사 풍경이 이리도 아름다울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松廣)’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구전(口傳)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羅?山:현재의 母后山)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木?]를 날렸더니 국사전(國師殿)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落臺)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崔南善)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의 방언)라고 풀었다.

    김영수(金映遂)는 이 산에 ‘솔갱이(松의 방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으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廣)’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崗)’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林錫珍)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와 <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 및 ≪승평속지 昇平續誌≫ 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釋照)가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우고 역부(役夫)를 소집하고 임목(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 되었다.

    50여 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知己)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불(佛)·법(法)·승(僧)의 전당(殿堂)을 중건하였고, 1399년(정종 1)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綸旨)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하였다. 이에 응선(應善)은 1601년(선조 34) 수각을 1604년과 1606년·1608년에 천자암과 보조암·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浮休)를 모셨다.

    부휴는 1609년 제자 400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 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落霞堂)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佛宇) 5개 소, 승료(僧寮) 8옥(屋), 공사(公舍)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경판 및 외향각(外香閣)의 유조(柚槽:감탕나무로 만든 구유),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奇峰)과 용운(龍雲)은 대웅전·명부전·응향각(凝香閣)·법왕문(法王門)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그런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1290냥(兩)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栗庵)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장탄문(墻坦門)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절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취봉(翠峯)과 금당(錦堂)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九山)이 설법전·수선사·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으로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주지 현호(玄虎)가 대웅보전·지장전·승보전(僧寶殿)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 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해청당(海淸堂)·행해당(行解堂), 서쪽의 문수전(文殊殿)·임경당·도성당(道成堂)이며, 현존하는 건물의 가람배치도는 다음 [그림]과 같다.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동구(洞口)에서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량각(淸凉閣)·일주문: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② 척주각(滌珠閣)·세월각(洗月閣)·우화각(羽化閣):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齋式時)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③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④ 대웅보전·설법전·수선사: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⑤ 상사당(上舍堂)·하사당(下舍堂)·응진전: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하사당·향적전(香積殿)·응진전·성수전(聖壽殿)·산신각·진여문·청운당·백운당·설법전·차안당(遮眼堂)·조사당·국사전·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광사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⑥ 국사전·진영각: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광사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⑦ 약사전·영산전: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광사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⑧ 관음전·지장전·화엄전: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월조헌(月照軒)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을 비롯하여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보물 제572호인 송광사고려문서(松廣寺高麗文書) 노비첩(奴婢帖)과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보물 제134호인 경질(經帙)과 보물 제175호인 송광사경패(松廣寺經牌), 보물 제176호인 송광사금동요령(松廣寺金銅搖鈴) 등이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는 제18호인 자정국사사리함(慈靜國師舍利函), 제19호인 능견난사(能見難思), 제22호인 송광사금강저(松廣寺金剛杵), 제28호인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願佛), 제30호인 파스파문자(八思巴文字) 등이 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 않는 신비성이 있다.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주요불경은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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