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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산대재 통도사 풍경
    사찰 풍경 2021. 10. 7. 22:58

    개산 대재를 맞이한 통도사 풍경입니다.

    대웅전(大雄殿) 조선(1644년),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지붕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 형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朴工) 부분이 보이게 하여 특이하며 기와 가운데에는 철제(鐵製) 기와도 올려져 있어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붕 정상에는 청동제(靑銅製) 보주(寶珠)가 있는데 직경 약 70㎝에 달하는 이 보주의 윗부분에는 다시 높이 50㎝ 가량의 길다란 철주(鐵柱)를 설치해 놓았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탑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도자기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웅전 중건 당시의 유물로 짐작된다.이 대웅전에는 건물의 4면에 편액을 걸었는데 동쪽이 대웅전(大雄殿), 서쪽이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이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하며,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대웅전의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이룩되었으며 이들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같은 목조조각은 전면 불단의 초자(草子)에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곧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나타내고 있다.건물의 크기는 남북이 15.8m, 동서가 10.1m이며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하였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버팀기둥, 즉 우주를 놓아 추녀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외양(外樣) 역시 조화를 잘 이룬 뛰어난 목조물이다. 주련 : 금강계단(金剛戒壇)初說有空人盡執 초설유공인진집처음에 공을 설하니 모두 집착하더니後非空有衆階捐 후비공유중계연뒤엔 공이 아니라 하니 모두 버리내龍宮滿藏醫方義 용궁만장의방의용궁에 가득한 경율론 의사의 처방과鶴樹終談理未玄 학수종담이미현학수에서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아니로다.주련 : 대방광전(大方廣殿)楊柳梢頭甘露灑 양류초두감로쇄버드나무 초순에 감로를 뿌리고連華香裏碧波寒 연화향리벽파한연꽃 향기 속에 푸른 파도가 서늘하네七寶池中標玉子 칠보지중표옥자칠보 연못에 옥자[표주박]를 띄우고九龍口裡浴金仙 구룡구리욕금선아홉 용이 입으로 金仙을 목욕시키는데大聖元來無執着 대성원래무집착대성은 원래 집착이 없다네.주련 : 대웅전(大雄殿)月磨銀漢轉成圓 월마은한전성원아름다운 저 달이여, 은하수를 돌고 돌아 둥글어 졌는가素面舒光照大千 소면서광조대천하얀 얼굴의 잔잔한 빛이 온누리를 비추네連비 山山空捉影 연비산산공착영원숭이들 달을 맞대며 부질없이 못 속의 달을 건지려 하나孤輪本不落靑天 고륜본불락청천높이 뜬 저 달은 본래부터 푸른 하늘에서 떨어진 일 없다네默契菩提大道心 묵계보리대도심묵묵히 깨달음의 대도심에 계합하네통도사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동서남북 사면에 모두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또 각각 주련이 달려있는데, 사천왕문을 통해 들어가면 관음전 쪽에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편액이란 널판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나 그림을 그린 것으로 대부분 가로로 길쭉하여 횡액(橫額)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현판(懸板)이라고도 부른다.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말이며, 액(額)은 이마 또는 형태를 뜻하는 말로,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붙여서 건물에 관련된 사항을 알려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때 건물 명칭을 표시한 것을 서서(署書)라고 한 것이 편액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 건물은 물론 도성과 문루, 궁궐 전각, 지방관아와 향교, 서원 등 일반주택에까지 붙여졌다.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에는 유독 흥선대원군 즉 석파(石坡)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일주문(一柱門)의 편액인‘靈鷲山 通度寺’의 글씨와 원통방 편액과 ‘금강계단’의 글씨 등이 모두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다음으로 주련(柱聯)을 살펴보면, 우선 글씨는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글씨이다. 통도사의 많은 주련들이 구하스님의 선필(禪筆)로 쓰여져 있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주련의 문장은 모두 다섯 구절로 이루어졌다. 앞의 네 구절은 칠언절구의 한시(漢詩) 형식으로, 중국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 거사(居士)의 누이 동생인 소소매(蘇小妹)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불교의식문 중의 하나인 관음예문(觀音禮文)에 실려 있다.관음예문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승되어온 의례문(儀禮文)으로 관음신앙을 중심으로 여러 불보살님에 대한 귀의, 예경, 찬탄, 발원의 글이 한데 어우러진 법문집인데, 이중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을 찬탄하는 문장 중 화신불을 찬탄하는 구절에 나와 있다.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구절은 앞의 내용과는 별 관계없이 기둥의 수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출처는 금강경오가해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중 종경장(宗鏡章)에 나오는 글이다.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하는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하시는 대목에서 종경스님이 글을 단 것이다.주련의 내용은 관음예문에 나와 있는 화신불(化身佛)을 찬탄하는 아름다운 문장이다.至心歸命禮 兜率陀天上 象駕日輪 摩竭提國中 龍蟠覺樹 敎談三百餘會 度脫衆生 住世七十九年 利樂郡品 應物隨形化 阿羅縛左那 裟婆一代敎主 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 月磨銀漢轉成圓 素面舒光照大千 連臂山山空捉影 孤輪本不落靑天중생에게 천백억 화신 나퉈 보이신 석가모니 거룩한 부처님께목숨바쳐 지심으로 절하옵나니 부처님은 도솔천 하늘 위에서눈부신 햇빛 속에 코끼리 타고 마야부인 태속에 드시었으며룸비니 꽃동산에 태어나실 땐 아홉 용이 맑은 물로 목욕시키고마가다국 보리의 나무 아래서 위없고 바른 깨침 이루시었네삼백여회 진리를 연설하시사 고통받는 많은 중생 건져 내시고칠십구년 이 세간에 머무르시사 중생에 이익주고 기쁨 주시니천백억 화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선 중생의 서로 다른 모습을 따라그에 맞는 여러 모습 나타내시네은하수에 달이 갈려 둥글어지니 흰 얼굴 빛을 펴서 온누리 비치네원숭이들 서로 서로 팔을 이어서 공연히 물 속의 달을 건지려 하지만홀로 밝은 저 달은 원래로부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襴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창건주인 자장율사에 대한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자장정률(慈藏定律)」의 기록에 의하면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인 1085년(고려 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허락하여 기원 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 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 서울 흥천사 ·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스님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 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중수연대화주문헌

    초창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慈藏律師) 삼국유사(三國遺事)
    제 1 중수 고려 우왕 5년(1379) 월송대사(月松大師) 목은이색기(牧隱李穡記)
    제 2 중수 조선 선조 30년(1603) 의영대사(儀靈大師) 송운사명기(松雲四溟記)
    제 3 중수 조선 효종 3년 (1652) 정인대사(淨仁大師) 우운진희기(友雲眞熙記)
    제 4 중수 조선 숙종 31년(1705) 규파대산(?坡大師) 민오기(敏悟記)
    제 5 중수 조선 영조 19년(1743) 산중대덕(山中大德) 서석인기(徐錫麟記)
    제 6 중수 조선 순조 23년(1823) 홍명대사(鴻溟大師) 계오기(戒悟記)
    제 7 중수 1911년 구하선사(九河禪師) 금강계단 현판

    주련

    • 示寂雙林問幾秋 시적쌍림문기추쌍림에서 열반에 드신지 몇해가 지났던가
    • 文殊溜寶待時求 문수유보대시구문수보살 보배를 모시고 시절인연 기다렸네
    • 全身舍利今猶在 전신사리금유재부처님 전신사리 지금까지 남아있어
    • 普使群生禮不休 보사근생예불휴세상곳곳 많은 중생들 쉬지않고 예배하네

    편액 :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는 사리탑(舍利塔)쪽에 걸려있는 편액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쓰여 있다. 이 편액에는 용이 두 마리가 장식되어 있고, ‘해동사문 천보(天輔)서’라는 관지(款識)와 나뭇잎 모양의 두인(頭印)과 ‘축산(鷲山)’ ‘김구하인(金九河印)’이라는 도서(圖署) 2과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도사에 주석하셨던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선필(禪筆)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의 글씨는 구한말의 서화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3~1933)의 글씨이다. 해강 김규진은 구한말의 뛰어난 서예가로, 통도사에 그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일주문의 기둥에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글씨도 해강의 글씨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말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찰을 말하는데, 먼저 적멸(寂滅)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경계(境界)를 표현한 말로서, 범어(梵語) 열반(涅槃 nirvana)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보궁(寶宮)이란 불상을 모시고 있는 집을 전(殿)이나 각(閣)이라 표현하는데 대하여 좀 더 상위개념으로 ‘궁(宮)’이라 사용한 것이고, 한층 더 높여 보배로운 궁전이라고 한 것이다. 보궁(寶宮)이란 말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화엄경을 설하셨던 장소를 적멸도량(寂滅道場)이라 하는데서 기인하는데, 중인도 마갈타국의 가야성 남쪽 니련선하 근처의 보리수아래 금강좌(金剛座)를 지칭한다. 화엄경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하여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드셨는데, 이때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였고, 이에 부처님은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과 한 몸이 되셨다고 한다. 따라서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본래 두둑한 언덕모양의 계단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께서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法)을 법계(法界)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곧 부처님과 동일체로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불상(佛像)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불상을 따로 만들지 않고 부처님과 동일하게 여겨지는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주련의 내용을 살펴보면, 통도사의 창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후 교화(敎化)를 마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涅槃)에 드신 후, 그로부터 1,100여년 후에 자장율사가 중국의 당나라에 구법(求法)유학을 떠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을 만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친착가사 한 벌과 발우, 그리고 사리 백과를 받아 643년에 귀국한 후 여기에 계단(戒壇)을 조성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많은 세월동안 환난을 겪으면서도 사리를 잘 지켜, 많은 사람들이 사리탑에 참배하고 있는 주련을 작성할 당시의 통도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살계 법회나 우란분절법회, 화엄산림(華嚴山林) 등 통도사의 여러 법회(法會) 때마다 삼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설법전(說法殿)을 발디딜 틈도 없이 가득 메우고, 심지어 법당 밖의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여 법회(法會)에 지극정성으로 참여하는 신심 깊은 많은 불자님들을 보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위대함과 오늘날 통도사의 상황을 이렇게도 미리 잘 알아 주련의 글을 쓰신 앞선 스님들의 선지(先知)에 대하여 경외와 공경의 마음으로 귀의(歸依)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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