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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국립박물관 전시 보물
    나의 이야기 2021. 8. 16. 13:03

    가슴걸이 다른 명칭胸飾​국적/시대한국>신라​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천마총재질금속>금>금 / 구슬 / 옥크기전체길이 64.0㎝​소장품번호경주2379​지정번호보물 제619호​설명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가슴 쪽은 U자형으로 늘어뜨리고, 양끝의 일부는 등 뒤로 넘겼다. 푸른빛의 둥근옥과 속이 빈 금제 구슬을 이어서 여섯 줄로 엮고, 네모기둥 모양의 금장식을 중간에 넣어서 가슴 쪽은 다섯 줄, 등 쪽은 세 줄이 되도록 고정하였다. 가슴 쪽과 등 쪽 끝에는 벽옥제 곱은옥을 각각 한 점씩 매달아 장식성을 높였다. 이와 같은 가슴걸이는 신라 지배계층의 상징적인 껴묻거리[副葬品]로 많이 애용되었다.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

    • 다른 명칭單鳳環頭大刀​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천마총
    • 재질금속>청동제>청동, 나무, 금속판 등
    • 크기길이 97.0㎝​
    • 소장품번호경주2338​
    • 지정번호보물 제621호​
    • 설명신라의 고리자루큰칼은 고리의 형상에 따라 민무늬․세잎무늬[三葉]․세고리[三累]․용무늬․봉황무늬․용봉무늬로 나뉜다. 용과 봉황으로 장식된 큰칼은 이 가운데 가장 늦게 유행하였다. 이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은 무덤 주인의 왼쪽 허리춤에서 출토되었다. 고리와 봉황은 한꺼번에 청동으로 만들어 도금하였다. 칼집과 칼자루는 나무에 금동판을 씌웠다. 칼집에는 작은 칼과 꼬챙이를 끼우는 부위가 있으며, 칼을 찰 때 끈을 끼웠던 마름모꼴의 고리도 있다.

    장식보검

    • 다른 명칭慶州 鷄林路 寶劍​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미추왕릉
    • 재질금속>금>금판 / 보석 등
    • 크기길이 36cm​
    • 소장품번호계림9​
    • 지정번호보물 제635호​
    • 설명경주 계림로 1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는 꼭지가 달린 자루나 칼집에 나무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썩어서 없어졌다. 칼집과 자루에는 얇은 금판을 전면에 입히고, 다시 작은 금판을 세워 붙여 물결·나뭇잎·원·타원·태극무늬 등을 만들어 조합시켰다. 이러한 무늬에는 붉은 마노와 재질을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있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및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드리개 다른 명칭金垂飾​국적/시대한국>신라​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황남동재질유리/보석>유리/보석>금구슬, 곱은옥 등크기길이 16.8㎝ 무게35.6g(왼쪽 드리개)​소장품번호기탁107​지정번호보물 제633호​설명달개로 꾸민 금구슬을 엮어 만든 드리개인데, 무덤에 묻힌 이후 구슬의 특성상 흐트러져 원래 모양을 완전히 복원하기 어렵다. 귀금속제 구슬은 주로 목걸이에 많이 쓰이는데, 특이하게 드리개에 쓰였다. 드리개의 맨 아래에는 곱은옥을 달았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드리개와 다르게 고리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발굴 정황으로 보아, 함께 출토된 굵은고리 귀걸이와 합쳐져 하나의 드리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제 달개달린굽다리접시 다른 명칭金製瓔珞附高杯​국적/시대한국>신라​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황남동 황남대총 북분재질금속>금크기높이:9.1cm, 입지름 10.4cm, 받침지름:6.5cm​소장품번호황북305​지정번호보물 제626호​설명신라 왕족의 화려한 장례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비해 소박한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어 부장품이 이처럼 화려하지는 않은 듯 하다. 신라 왕족이 돌무지덧널무덤 속에 묻힌 이유도 화려한 껴묻거리가 도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금으로 만든 이 굽다리접시(金製瓔珞附高杯)는 무덤 속에 일반적으로 껴묻는 흙으로 만든 굽다리접시와 모양이 같다. 특히 굽다리의 중간 부분을 돌출시켜 2줄의 돌대를 만들고, 끝 부분에 금판을 덧대어 두툼하게 처리하여 최대한 토제 고배와 유사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소재가 금속이라는 속상 상 접시 바닥 안쪽에 굽다리와 연결하기 위한 못이 있는 점은 다르다.

    대한민국의 국보[편집]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종목시대주소정보

     대한민국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복제품)
    국보 제126-6호
    8세기 신라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15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하다가 발견된 불교 경전의 목판본이다. 제2층 탑신부에 봉안되어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舍利外函)에서 다른 여러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와 함께 나왔다.[1] 이는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 국보 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시기[편집]

    본문 중에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가 집권했을 때에만 사용되었던 무주제자가 발견되어, 불국사 삼층석탑이 중수되기 이전에 인쇄되었다고 인정된다. 704년에 다라니경이 산스크리트어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었고, 불국사가 세워진 것은 751년이기 때문에, 그 두 시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당시에 묵서지편(墨書紙片)으로 알려진 종이 뭉치가 같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1988~89년에 보존 처리가 진행되었고, 1997~98년에 110쪽으로 분리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이 중수기는 2005년과 2007년에 해석이 되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 연대 논란을 일으켰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엄장구(보물 366호)

    경북 경주시 양동면 용당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엄장구이다. 1956년 서삼층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사리엄장구는 청동으로 만든 사리함(외함)과 사리를 넣었던 사리기로 구성되어 있다. 사리함은 옆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짐승얼굴모양의 고리가 사천왕상 옆에 달려 있다. 청동으로 만든 사리기는 기단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탑에서 출토된 사리구(보물1359호)와는 달리 닫집형태를 만드는 기둥과 지붕이 남아 있지 않다. 사리함을 장식하고 있는 사천왕상은 경주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사천왕상과 비슷하며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사천왕사를 건축하는데 큰 역할을 서역출신 양지스님이 감은사지 사리엄장구를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舍利)는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며,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처음 생긴 이래로 성행했다. 석가모니가의 사리를 8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탑을 세운 것이 불탑의 시초이며, 아소카왕이 이를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신앙의 중심 대상이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탑을 중심으로 사찰의 가람을 배치하였다. 삼국시대 이래로 전국적으로 세워졌던 많은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탑 내부에 많이 모셔졌으며, 이들 사리구들은 오늘날까지 석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엄장구, 보물 366호, 경북 경주시 일성로(경주박물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한 감은사 서탑의 사리갖춤입니다. 1959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3층 탑신 윗면에 뚫린 장방형의 구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리갖춤은 제일 안쪽에서부터 수정사리병-사리기-금동사리외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리외함에는 사천왕을 따로 만들어 부착하였습니다. 서역인을 연상시키는 이국적인 얼굴과 사실적이고 험상궂은 표정, 힘찬 자세,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등 통일신라 초기 사실적인 조각 양식을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임신서기석

    • 다른 명칭壬申誓記石​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월성군 견곡면 금장리
    • 재질석>석재 기타
    • 크기최고 높이 : 32, 최대 너비 : 12.3​
    • 소장품번호경주282​
    • 지정번호보물 제1411호​
    • 설명비문(碑文)의 첫머리에 壬申年이라는 간지(干支)가 있고 내용 중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있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 한다. 비문은 구획선 없이 5행(行) 74자를 새겼다. 내용은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 충도(忠道)의 실천을 서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인 壬申年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화랑도가 번창하던 552년, 또는 612년으로 추정된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좌표: 

    북위 35° 47′ 0″ 동경 129° 1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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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종목수량시대소유위치주소좌표정보

     대한민국 국보
     
    국보 제318호
    (2015년 4월 22일 지정)
    1기
    신라
    국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132-0 (마동,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북위 35° 47′ 0″ 동경 129° 18′ 29″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종목정보

     대한민국 보물(해지)
    보물 제1758호
    (2012년 2월 22일 지정)
    (2015년 4월 22일 해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비석이다. 2012년 2월 2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58호로 지정[1]되었다가, 2015년 4월 22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18호로 승격[2][3]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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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편집]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이 비는 신라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이 비의 발견 장소가 포항 냉수리 신라비 발견 장소로부터 8.7km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 데다, 비문의 내용 또한 유사점이 많다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성이 있고, 그리고 관직명과 관등 표기의 유사성 및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나타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추정되는 인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ㆍ확정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1]

    특히 이 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그 연대가 가장 앞선 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신라의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우선 문장 기술이 능숙하거나 세련되지 못한 점으로 보아 당시 신라에서는 중국의 한문(漢文)이 크게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비문의 서체로 보아 중국의 한(漢)나라 또는 위진(魏晉)시대 서예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이 비의 서체를 굳이 중국의 서예 발전의 과정 상에서 비추어 본다면, 소전(小篆)으로부터 예서(隸書)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 상의 고예(古隸)에 비견해 보거나, 상하 장방형(長方形)의 소전체로부터 좌우 편방형(偏旁形)의 예서체로의 이행 과정 상에서 잠시 나타났던 파책(波磔)이 없는 고예체에 비견해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중국의 서체와 서풍에 별로 영향받지 않은, 신라의 자생적, 토속적 서체ㆍ서풍이라 하겠다. 글자의 결구가 불균형의 조화를 이루면서,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익살로 넉넉한 여유로움의 자유를 구현하는 무정형(無定形)적 서예미학을 창출하고 있다. 이는 어느 서체ㆍ서풍만을 고집하지 않고 전법(篆法)ㆍ예법(隸法)ㆍ해법(楷法)은 물론 행법(行法)까지도 두루 섭취ㆍ융합하여 불균형의 조화를 구현하고 있는 신라적 자생서예라고 하겠다.[1]

    이 비는 통일신라 이전 신라시대의 심미의식과 초기 신라 서예사를 밝히는 데 획기적 자료이다.[1]

    또한 이 비는 통일신라 이전의 역사와 문화 예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1]

    국보 승격사유[편집]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에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화강암(花崗巖) 1면에서 전체 12행 20자로 음각(陰刻)된 도합 203자의 비문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석은 비면 상단부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비문의 대부분은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이다.[2]

    이 비의 비문은 신라 관등제의 성립과정, 신라 6부의 내부 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궁(宮)의 의미, 사건 판결후 재발 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2]

    이 비의 글씨체는 예서로 분류되는데 ,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서 신라 특유의 진솔미를 보여 준다. 가로획에서 수평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울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에서 예서임을 알 수 있으며, 다소 보이는 해서의 필의(筆意)는 단양적성비같은 고해서(古楷書)로 변해가는 전초(顚草)이며 선구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냉수리비와 봉평비보다도 더욱 신라스럽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있다.[2]

    또한 제작시기도 지증왕 4(503)년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 보다도 2년이나 앞서는 신라 최고의 비이다. 더욱이 제작시기가 늦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 (법흥왕 11, 524)도 이미 1988년에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고, < 포항 냉수리 신라비 > (지증왕 4, 503)도 1991년에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2]

    따라서 이와 같은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에 의거, 현재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된 이 비를 국가문화재 국보로 승격 지정하여 연구하고 보존·관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2]

     

    목걸이

    • 다른 명칭象嵌​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황남동
    • 재질유리/보석>유리/보석
    • 크기길이 41.6㎝​
    • 소장품번호기탁108​
    • 지정번호보물 제634호​
    • 설명무덤 주인의 가슴 부위에서 출토되었다. 비록 하나의 줄에 묶여 있지만 재질, 형태, 크기, 색상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마노제의 곱은옥, 다면옥, 둥근옥, 벽옥제의 대롱옥, 수정제의 대추옥, 유리제의 둥근옥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색상도 붉은빛과 푸른빛, 초록빛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유리제 둥근옥 중에는 지름이 1.8㎝에 이르는 대형구슬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표면에 파랑·노랑·빨강·흰색의 색유리로 사람얼굴과 오리, 꽃나무 무늬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 붙

    수모양 주전자

    • 다른 명칭瑞獸形注子​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미추왕릉지구
    • 재질금속>금속 기타
    • 크기높이 14.0㎝​
    • 소장품번호기탁114​
    • 지정번호보물 제636호​
    • 설명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형상을 한 상상의 동물이 굽다리 위에 올려져 있는 이형토기異形土器이다. 흡사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현무玄武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의미를 담아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몸통 속은 비어있는데 등에는 깔때기 모양의 주입구注入口가 있고 가슴부분에는 대롱형의 귀때가 달려 있어 주전자와 같은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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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무늬 수막새

    • 다른 명칭人面文圓瓦當​
    • 국적/시대한국>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전영묘사지
    • 재질
    • 크기현재길이 11.5㎝​
    • 소장품번호경주1564​
    • 지정번호보물 2010호​
    • 설명얼굴무늬 수막새는 도톰한 입술과 위로 들린 입꼬리, 얕은 볼, 살짝 내민 눈동자가 서로 어우러져 천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막새에 얼굴형상을 하여 지붕 위에 올렸던 이유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려는 의도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당시 일본인 다나카 토시노부가 구하여 보관하다 1972년 10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이다. 기와의 제작연대는 외측에 넓은 테두리를 마련하고 높은 온도에서 구운 점, 얼굴 양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로 추정된

    동제투겁창

    • 다른 명칭銅製矛​
    • 국적/시대한국>초기철기​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외동면 죽동리
    • 재질금속>청동제
    • 크기너비:4.2cm, 길이:28.2cm​
    • 소장품번호국은11​
    • 지정번호보물 제1152호​
    • 설명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청동투겁창이다. 청동기시대에 사용되던 무기류이다. 자루와 장착되는 부분이 약간 파손된 것 외에는 형태가 잘 남아 있다. 매우 특이한 형태의 투겁창인데, 비슷한 형태의 투겁창이 경주 입실리에서도 1점 출토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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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칼

    • 다른 명칭銅劍​
    • 국적/시대한국>초기철기​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외동면 죽동리
    • 재질금속>청동제
    • 크기너비:3cm, 길이:30.2cm​
    • 소장품번호국은13​
    • 지정번호보물 제1152호​
    • 설명국은 이양선 선생의 기증품으로 청동검이다. 청동기시대에 사용되던 무기류이다. 대부분의 청동검에 비하여 길이가 매우 긴 편이고, 피홈 역시 약간 오목하게 들어간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식동검 중에서는 늦은 시기에 속하며, 비슷한 형태의 동검으로 대구 비산동 출토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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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초심지가위

    • 다른 명칭金銅燭鋏​
    • 국적/시대한국>통일신라​
    • 출토지경상북도>경주시>인왕동 안압지
    • 재질금속>금>금동
    • 크기길이 25.5cm​
    • 소장품번호안압지 1479​
    • 지정번호보물 제1844호​
    • 설명초의 심지를 자르는데 사용했던 가위다. 잘린 초와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각각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워으며 손잡이쪽에 방울무늬[魚子文]와 당초무늬[唐草文]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가위는 일본 정창원(正倉院)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세부 장식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매우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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