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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악산 직지사
    사찰 풍경 2019. 1. 30. 23:16

    2019년1월 26일 백두대간 우두령에서 시작하여 삼성산- 여정봉-바람재-형제봉-황악산을 거쳐서 직지사로 하산하면서 들른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를 전파한 아도화상이 창건 하였다고 하는 유서 깊은 사찰 김천 직지사 풍경입니다.






    직지사

    천불선원전경


    99년에 개원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면 피안에 이르러 고요한속에 죽비소리만이 정적을 깨울뿐 ... 나는 새들도 숨을 죽입니다.


    직지사(直指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의 본사로서 황악산(黃鶴山,해발 1111미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황악산의 '황(簧)'은 중앙을 상징하는 글자로 소백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경상,전라,충청3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 산 아래 선의 상승종위(上乘宗違)인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에서 직지라는 사명을 따온 직지사가 자리를 틀고 있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고 선덕여왕 14년(645) 자광 율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나 창건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경순왕 4년(930) 천묵스님이 중수하였으며 고려조에 들어와 능여대사가 태조의 도움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등곡학조(燈谷學粗) 스님이 중수했으나 선조 29년(1596) 임진왜란 때 43동의 건물 중 천불전, 천왕문, 자하문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는 운을 겪었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중건불사를 벌여 상당한 규모를 유지했으나 1805년부터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다가 6.25동난과 정화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퇴락했다. 1958년 녹원 스님이 주지로 재직하면서 직지사는 면목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1966년 이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거행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여 오늘날 대가람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현재 직지사에는 쌍탑을 거느리고 묵중하게 들어선 대웅전과 규모가 큰 천불전을 비롯하여 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범종각.일주문.금강문. 사천왕문.천불선원과 요사체.명월료.청풍료.설법전.제하당. 남월료.만덕전등 65동의 전각이 들어서 있다.


    선원의 연혁
    사명(寺名)인 '직지(直指)'가 선의 본래 마음 자리를 가리키는 손짓인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직지사와 선의 관계는 불이적(不二的)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지사에 선맥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직지사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사격이 드높았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책의 암울한 기류속에서도 오히려 조정에서 직지사에 고선종대가람이란 첩문(帖文)을 내려 비호함으로써 많은 선지식인들이 대를이어 배출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끊일 듯하면 법맥을 이은 법계정심 스님이 이곳 황악산에 몸을 숨겼고, 세조대에 학덕겸전(學德兼全)의 고승으로 널리 알려진 동곡학조 스님이 이곳에서 선지를 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구국의 승병장이자 뛰어난 선승인 사명유정(1544-1610)스님이 이곳으로 출가해 신묵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한때 주지를 맡기까지 했다.
    1910년 직지사 염불회를 수선사(修禪社)로 개명, 여름과 겨울 안거시에 5-6명의 운수(芸水)가 입방하면서 근대 직지사 선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선종 고찰에 선원이 없어서는 안되겠다는 역사적 요청에 천불전 옆 천불암의 천불암 염불회를 고쳐 선원을 창설한 것이다. 동년 10월 서전(西殿)으로 선회를 옮겼으며, 1913년 봄에는 중앙사우(中央社宇)를 수리하고 선회를 다시 이전했다. 당시 참선 남자는 3명이었다. 직지사에서 1913년의 봄은 선원의 기틀을 본격적으로 다지는 의미 깊은 해이기도 하다. 그 해 당대의 뛰어난 선승 제산 스님이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와 17년 동안(1929년까지) 천불선원의 조실로 머물면서 선원을 부흥시켜 직지사는 선본 총찰로서 잃었던 옛 영화를 다시 찿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퇴운.탄웅 같은 훌륭한 선사의 출현도 천불선원의 풍광을 드높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산 스님을 종주로 삼고, 퇴운 스님을 화주로 삼아 비록 암묵열뇌(暗墨熱惱)의 일제 치하에서도 황악 일역에는 상연한 선풍이 드날렸던 것이다. 당시 선원은 비로전(천불전) 옆 명월료 자리에 위치했으며 선원의 이름은 천불선원이었다.
    1915년 한국선의 큰 봉우리 경봉(鏡峰)스님이 해인사 퇴설당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직지사로 오는데 당시 천불선원에는 만봉(萬峰),남전(南展)스님이 머루르고 있었으며, 경봉 스님은 남전 스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선 수행을 하였다. 활구선(活句禪)을 선양한 전강(田岡) 스님은 1918년 직지사로 와서 선방 남자들과 화두를 들다가 상기병을 얻어 목에서 피가 나고 나중에는 핏기마저 없을 정도로 정진을 감행.초견성(初見性)의 깨달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다.
    1918년 자비보살 고암 스님은 제산 스님을 모시고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한철을 보냈으며 당시 30여 명의 납자가 안거중이었다. 1920년 당시에는 고해담 .이석암등 구참 수좌의 지도 아래 묵별 7일정진이라는 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많은 수선자들이 온 힘을 기울여 정진을 거듭했다. 1924년 4월 하안거부터 1926년 하안거까지 직지사에서 열린 3년 결사 때는 정화운동 당시 비구측의 종정을 맡았던 동산 스님이 참여하여 용맹정진 하였으며, 고암 스님도 1924, 25년에 천불선원에서 정진했다. 1926년에는 비구니 '성문'스님이 서전에서 선방을 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1935년에 금오 스님이 직지사 조실로 주석하여 납자들을 제접했다. 1939년 하안거에는 탄용 스님이 조실로 머물렸으며 동안거 때는 박고봉.박금붕스님이 선댁 소임을 맡았다.
    1940년, 50년대까지 납자들의 수행 정진이 끊이지 않았던 천불선원은 온돌 과열로 화재를 입어 전소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폐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불선원의 불행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58년 2월 녹원 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들어서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에 착수하면서 그 첫불사로 천불선원을 중건한 것이다. 사찰에는 우선 수선(修禪)할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당시 녹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온돌 과열로 대선실이 전소되고 그리하여 산새들은 아침저녁으로 빈터를 바라보며 울고 수선자들은 봄가을에 구름을 바라보며 탄식하는데 생각건대 선실 없는 선찰이 어디 있을 것이며 복전을 갈지 않고 무슨 불과를 얻을것인가." 이렇게 스님의 정성과 원력에의해 명월료 뒤편, 앞으로 물이 흐르고 좌우와 뒤로는 숲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길상지에 천불선원을 다시 세우게 되니, 1966년 4월에 착공하여 1971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현존하는 방명록 기록에 따르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조실 고암 스님, 입승 영수스님의 8-9명의 납자가 정진하였고, 1981년부터 1982년까지는 조실 관응, 입승은 성광 및 원산 스님을 비롯하여 10여 명이 정진하다가 중단하였다. 1999년 여름 안거 때 선원을 다시 개원하여 한주 항전. 입승 대전 스님의 18명의 납자가 정진하였다.

    선원의 현황 및 특징

    향경다실은 선원내에 있는 요사체로서
    스님들이 쉬는 지대방과 다각실이 있는 곳입니다.


    극락전, 향경다실(香經茶室), 서상당(西上堂) 등이 들어선 천불선원 영역은 황악산에서 흘러 내리는 계류와 숲으로 둘러싸여 속기가 범접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청정하다. 선원으로 들어서는 단 하나의 통로는 계류 위를 밟고 올라서 있는 도피안교를 지나는 길이다. 그 길로 10여미터쯤 가서 안양루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선면 깨끗하면서도 적정한 선원 일대가 한눈에 다가선다. 정면으로 극락전, 좌측으로 향경다실,우측으로는 동상당이 있으며 향경다실 뒤에 자그마한 서상당이 서 있다. 선원 큰방은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1971년에 공사비 5천만원을 들여 개보수하였고 1999년 봄에 참선 납자들이 수선할 수 있도록 개수하여 현재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불선원 일원은 1971년 당시만 해도 한국 최대의 목조건물로서 극락전 큰방이 59.63평, 향경다실 36.81평, 동상당 55.65평,서상당 9.6평, 안양루가 11.32평 이었다.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쯤은 내다보고 국보급 목조건물 목록에 기록 되리라는 혜안을 가지고 지은 건물이다. 큰방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입공계 지붕으로 수용 인원은 20명이다. 입방 조건으로 비구만 받고 기초선원에 다니는 스님은 받지 않는다. 절에서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요 인물

    (1)제산정원(1862~1930)


    1862년에 합천 가야면 구원리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김씨며 법명은 정원이다. 1873년, 14세 때 해인사에서 우신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891년,30세에 발심하여 행각실에 올라 수월,천원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퇴설선원 조실로 있을 당시 원주 소임을 보면서 참선 정진 하였으며 이후 퇴설선원 조실로서 납자들을 제접했다. 법을 사명 스님의 적손인 우송 스님으로부터이었다. 제산 스님은 소년시절에는 탁주를 좋아하여 '탁백이'수좌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파격적인 납승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는 보살행으로 수좌들에세는 인기가 좋았다. 중년에 이르러 스님은 모범적인 수좌가 되었는데 발심하여 선방에 들어앉아 가부좌를 틀면서 계행도 엄정했다. 해인사에 있을 당시 경허 스님으로부터 "자네는 어디 가든지 50~60명의 수좌는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던 스님은 1913년 봄, 41세 때 대중들을 이끌고 황악산 직지사로 향했다. 스님은 직지사 벽안당에 앉아 평생을 정좌불와하고 동구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서 천불선원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는 등 수행에 매진했다. 그래서, 당시 교계에서는 제산 스님을 수행제일로 평했다. 한때 천불선원에 참선 정진했던 동광스님은 제산 스님이 용맹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본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0년 8월 24일 입적하니, 세수 69세, 법랍이 56년이었다. 입적에 들기전 문인 등이 물었다. "생이란 무엇입니까?" "본래 불생(不生)이거늘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바람이 고동치고 불이 바다밑을 태우니 천만고에 다만 이러할 뿐이로다." 스님은 이 말을 남기고 좌탈입망했다. 직지사에 '제산정원선사비"가 세워져 있다. 비명(碑銘)은 한암중원이 찬(瓚)했다.

    (2)퇴운원일(1877~1939)


    1877년 7월 27일 합천읍에서 태어난 퇴운 스님은 15세에 해인사로 들어가 우송 노사에게 축발하고 계를 받았다. 30세에 발심하여 행각을 떠나 정진하였으며 우송 스님의 법을이으니 제산 스님과는 법으로 문중 형제간이어서 같은 마음으로 서로 탁마하였다. 1916년 봄에 해인사에서 직지사로 옮겨와 선원에서 수행하면서 법화를 드날리며 공덕을 쌓는 동시에 1928년 봄에 법당과 요사 등의 번와 불사를 하고, 1939년 봄에 천불전 중수를 부촉하고 입적에 들었다. 세주 62세, 법랍은48년이었다. 평소 근검절약하며 상주들을 아끼고 보호하여 논 100여 석지기를 사들이니 그 세수(歲收)로서 선원의 살림이 풍족하였다 한다. 직지사에 '퇴운원일선사비'가 있다. 비명은 한암중원이 찬했다.

    (3) 탄옹정혜(생몰연대 미상)


    제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으며 직지사 천불선원 제산 스님 화상에서 참선 정진했다. 탄응 스님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좌선 정진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1933년 선학원 중앙선원 입승을 보며 정진했으며 1936년 오대산상원사슬련수련소에서 입승 소임을 보며 선원의 기강을 바로잡는 등 선풍 진작에 큰 공헌을 하였다.
    탄응 스님은 1940년에 직지사로 와 납자들을 제접했으며 1941년 녹원 스님은 탄응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녹원 스님은 은사 탄응 스님을 회상하며서 이렇게 말했다. "탄응 스님은 말보다 행이 먼저였어요. 수행자는 언제나 하심(下心)하라고 가르치셨고 말을 많이 하면 실행하지 못하니 항상 과묵하라 하셨지요.. 스님의 행주좌와 어묵동성이 모두 선(禪)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추운 겨울날 화로를 지폈는제 화롯불을 쪼이시다가 참선살매에 드신 게예요. 화로의 잿불이 손에 닿아도 모르고 계셔서 흔들어 깨울정도였어요. 이처럼 무념무상 무욕의 자세로 살아가신 스님의 모습은 언제나 귀감이 됐지요." 한편 탄응 스님은 60때까지 상원사 선원에서 정진했던 듯하다. 당시 정진한 도반이었던 현 하계사조실 고송 스님의 말에 따르면, 탄응 스님을 지칭하여 "아주 보살이었어.그만한 중이없었어. 탄응 스님 상좌가 직지사의 관응 스님, 녹원 스님이야. 보살이라 상좌를 잘 뒀어."라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4)관응지안(1910 ~ 2004)


    스님은 1910년 9월 17일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전재영이며 법명이 혜응이고 법호가 관옹이다. 1929년 5월 12일, 상주 남장사에서 탄옹정혜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34년 유점사에서 대교를 마치고 1936년 3월 15일 선학원에서 일봉 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8년 동국대 전신인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수 일본으로 도일, 1942년일본 용곡 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조계사 주지, 1961년 동국학원 이사를 역임했으며 1965년에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결사를 성만했다. 조계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비구.대처의 분규에 염증을 느껴 조용히 머물 곳을 물색하던중 찿은 곳이 천축사 무문관이었다. 스님은 6년 동안 완전히 외부와 차단되어 부처님의 6년간 설산 고행을 본받으면서 면벽참선했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어 박차고 나오는 것은 곧 자신의 거짓된 껍질을 완전히 부수어 내외가 명철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또한 스님은 재가자들을 향한 법문에서 화두만이 견성의 길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집이든 문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이지 어느 쪽 문만 사용한다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어느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현대불교신문> 에서 말한 적이 있다. 스님은 강사로서도 이름이 높아 김룡사 강원강사 이래 10여 년간 강사 생활를 했다. 특히 유식학에 조예가 깊다. 스님은 1980년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납자들을 제접했다. 1981년부터 82년까지 직지사 천불선원 조실로 지냈다.



    비로전(毘盧殿)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또한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천불상(千佛像)


    비로전 내의 천불상은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불상의 재료는 경주 특산인 옥돌을 사용하였는데 ,그 모습은 사방의 모든 부처님을 모셔놓은 듯 장엄하다.


    동자상(童子像)


    천불상 중 독특하게 벌거벗은 동자의 모습을 한 불상으로 법당에 들어가 첫눈에 이 동자상을 보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동자상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고려 태조 14년(931)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임진왜란에 전소되었던 것을 효종 7년(1656) 관음전으로 중건 하였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개액 하였다. 이건물은 그 후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중수

    응진전(應眞殿) 나한상(羅漢像)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상수제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담과 함께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되었는데 이때는 기와 번와,단청 및 석조 축대까지 신축(1970.3.1~1971.11.30)되었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협시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로 나타난다. 대승불교가 낳은 수많은 보살중에서 관세음보살 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 주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대웅전(大雄殿)


    신라시대 대웅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미상이나 고려 이후 조선 초기,적어도 정종대까지는 2층 5간의 특수한 건물이었던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사적기에 대웅대 광명전이라 하였는데 명칭부터 특이하여 혹시 당시에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을 동시에 봉안했는지 알 수 없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사승 인수,명례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현 건물은 이로부터 150여 년 후인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전 주지 설운 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 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개와공,도감,그리고 화사,총찰도감,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고 있는데, 이 명단은 중창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들은 주지 녹원 화상에 의하여 연목 교체 및 기와를 번와(1969.3.1~1970.11.30) 할 때 확인 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대웅전의 주위 석축 및 축대를 새로 조성(1973.4.10~1975.6.20)하여 필역 하였다. 다시 녹원 화상에 의하여 재차 연목 및 기와가 번와(1979.10.25~1980.1.14)되었고, 1980년 8월에는 부분적으로 고색금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직지사 대웅전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215호였는데,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불교(韓國佛敎) 1천 6백년의 역사(歷史)와 그 세월(歲月)을 같이 하다.


    서기 418년, 아도 화상에 의해 세워져 1천 6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고,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아름다운 경내가 뭇 사찰중에서도 으뜸이다.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하고 있다.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山谷)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野地)인듯 하면서도 산사(山寺)의 풍취(風趣) 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毘盧峰)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仙遊峰)을 비롯하여 천룡봉(天龍峰)과 운수봉(雲水峰)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絶景臺)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雲水庵)이 있어 승경(勝景)을 이룬다. 운수봉(雲水峰)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白雲峰)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萬景臺)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望月峰)과 함께 신선봉(神仙峰)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兄弟峰)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년(930) 천묵 대사 (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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