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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남산 탑곡 마애 불상군
    사찰 풍경 2015. 12. 6. 23:37

     

    경주 남산의 탑곡 마애 불상군으로 한곳에 많은 불상과 탑 승려등이 새겨져 있는 보기 드문 마애 불상으로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곳입니다.

    자연석에 새겨진 신라인의 숨결이 묻어나는 유적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군.

    개설

    보물 제201호. 경주시 남산 탑곡에 높이 약 9m, 둘레 약 26m의 큰 바위 4면에는 수십 구의 불보살상과 기타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바위 남면은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한 단 높은 대지를 이루고, 동·북·서면은 이보다 한 단 낮아 바위의 전체 높이가 9m 정도 된다.

    내용

    남면에는 석탑과 석등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탑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남면의 바위 면은 40㎝ 정도의 틈이 벌어져 두 면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 상체만 보이는 나한상()이 부조()되어 있다. 그 앞에 환조()의 보살형 불상이 서 있고 그 옆의 바위에 또 하나의 나한상이 부조되어 있다.

    삼존불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보살이 본존 쪽으로 몸을 비틀고 있다. 본존은 마멸이 심하여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동면 본존불과 유사하게 얕은 육계, 둥근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길고 유연한 상체에 넓게 퍼진 무릎이 특징적인 체구, 간명한 옷주름 선 등이 나타난다. 광배는 두광으로 원형 광배에 연꽃과 광선무늬가 있으며, 대좌는 만개한 연꽃무늬로 구성한 특이한 모양이다.

    왼쪽 암면에 새겨진 나한상은 앳된 동안()의 모습과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옷자락으로 덮어 내린 동자승 모습이다. 환조상의 옆 바위에 새겨진 나한상은 옆에서 바라본 모습인데, 길고 복스러운 얼굴, 위엄 있는 자세 등을 뛰어난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면에는 삼존불상과 공양하는 승려상, 6구의 비천상이 있고, 왼쪽의 앞면에는 두 그루의 나무 밑에 참선하고 있는 승려상 그리고 그 앞 바위에 새겨진 보살형상 등 모두 11구의 불상과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의 중앙 본존은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고 길며, 코 역시 길고 큼직하다. 입은 작고 미소를 머금고 있다. 상체는 유연하고 길며, 하체의 무릎은 유난히 넓다. 두 손은 앞섶의 옷자락 속에 넣고 있다. 광배는 둥근 두광()으로, 16잎의 연꽃과 36선의 광선으로 구성된 독특한 모양이며 대좌는 특이한 연꽃무늬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긴 눈썹, 매부리코, 큼직한 입 등 이국적인 모습이다. 공양상()도 이국적인 얼굴인데 아마도 서역 계통의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의 위에는 상체만 보이는 비천상들이 날고 있다.

    서면에는 나무 밑에 결가부좌한 불상 1구와 비천 2구가 새겨져 있다. 두 그루의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불상은 얼굴이나 체구는 거의 동면상과 흡사하다.

    북면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서 있고, 탑 밑에는 마주보며 날뛰고 있는 괴수가 보이며, 탑 상륜부 사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이 있다. 불상은 동면 본존과 흡사하며, 머리 위에는 화려한 보개()가 새겨져 있고, 9층탑의 상륜에 걸쳐 비천 1구가 불상을 향하여 날고 있다.

    특징

    충청남도 연기 지방의 비상()들의 구도와 유사한 점도 있지만, 이 부조들이 훨씬 자유분방하여 중국의 비상이나 남향당산() 제1동 등 석굴사원의 구도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불상들의 형태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얼굴의 양감이나 파격적인 고졸한 미소 등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이나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5호)을 연상시킨다. 세부의 형식들, 즉 연꽃무늬나 두광배의 특징 등도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이나 비암사() 비상들과 상통한다. 따라서 이 조각의 조성 연대는 7세기 중엽으로, 삼국 말기의 신라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 불상들은 석주 4면에 새겨져 있어 일종의 사방불로 보이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로 사방불의 수용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로 생각된다. 이 사방불은 『관불삼매해경()』과 『금광명경()』에 의한 사방불이며, 이 절 이름이 명문 기와에 의하여 신인사()로 밝혀졌으므로 신인종의 미술로 우리 나라 불교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사방불은 새로운 방위 개념을 체계화시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의지를 나타낸 작품이 아닌가 한다. 사천왕사()가 신상()으로 당군()을 물리치고자 하였다면, 이 신인사방불은 사방불로써 마군을 항복받고자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이 순간을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의 소원을 따라

    모두 방편으로 만족하게 하신다.

    (화엄경)

     

    부처님의 출가, 고행, 수행, 깨달음

    |맛지마 니까야: 26 아리야빠리예사나 경 13-19|


    [스승 웃다까 라마뿟따]
    나는 계속 바람직한 것을 찾아서, 숭고한 평화의 최상의 경지를 찾으면서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웃다까 라마뿟따여, 나는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청정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 가르침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오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빠르게 그 가르침을 성취하였다. 단지 암송이나 복창(반복함)의 가르침에 관하여 말하면 나는 지혜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장로들의 이론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알고 본다'고 선언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지 믿음만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그는 가르침을 알고 본다.'

    그래서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물었다.

    "라마시여, 어떤 면에서 그대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언하십니까?"

    이에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웃다까 라마뿟따에게만 신심과, 정진, 마음챙김, 집중, 그리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또한 신심과, 정진, 마음챙김, 집중, 그리고 지혜가 있다.

    그러니 나도 그와 같은 경지를 얻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였다. 오래지 않아 나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담마를 성취하였다.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물었다.

    "라마시여, 그대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언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바로 그것이요, 벗이여."

    "존자여, 나도 또한 지혜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함이요. 벗이여, 청정한 삶에서 존자님과 같은 동료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유익함이오. 라마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그대도 똑같이 깨달았소.

    또 그대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라마가 똑같이 깨달았소. 그대가 아는 가르침을 라마가 알고, 라마가 아는 가르침을 그대가 알게 되었소. 그러니 벗이여, 그대가 이 공동체를 이끌어 가면 어떻겠소?

    이렇게 청정한 삶의 동료인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를 스승의 지위에 놓았고 최고의 존경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가르침은 깨어있음, 욕망의 소멸, 번뇌의 소멸,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직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머문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떠났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자기나 남을 위하여

    재물과 오락을 위하여 거짓으로써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하늘에 태어나는 길이다.

    (잡아함경)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마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마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마라.

    (열반경)

     

    같은 것을 먹으니 한 몸이다! 

     
    같은 것을 먹고 있으니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밀가루로 국수도 만들고 라면도 만들고 빵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수 따로, 라면 따로, 빵 따로 있는 줄 알지만 결국은 모두 밀가루 아닙니까?

    이처럼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재료로 구성되고, 똑같은 재료가 만나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공기, 같은 햇빛, 같은 물, 같은 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몸입니다.
    성담 스님의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특별한 여행, 금강경> 중에서

     

     

    선하고 악한 일은 제 마음으로 짓는 것이고

    화와 복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다.

    (아난분별경)

     

     

    언제나 깨어 있어 잘 깨닫는 그는 부처님의 제자다.

    낮이나 밤이나 자비를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자비를 즐긴다.

    (법구경)

     

     

    제자는 다섯가지로 스승에게 공경하고 봉양하느니라.

    반드시 듣는 데 자세히 하며

    배움을 좋아하며 일에 있어서 민첩하며

    허물이 없게 하며 스승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선생자경)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삶은 구함도 없고 하고자 함도 없기 때문에 그런 근심이 없다.

    (불유교경)

     

     

    부처님의 출가, 고행, 수행, 깨달음

    |맛지마 니까야: 26 아리야빠리예사나 경 13-19|


    [스승 알라라 깔라마]

    이와 같이 출가를 하여 나는 바람직한 것을 찾아서 숭고한 평화의 최상의 경지를 찾아서 알라라 깔라마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깔라마시여, 나는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청정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 가르침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오래지 않아 스승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빠르게 그 가르침을 성취하였다. 단지 암송이나 복창(반복함)의 가르침에 관하여 말하면 나는 지혜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장로들의 이론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알고 나는 본다'고 선언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알라라 깔라마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지 믿음만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그는 가르침을 알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가서 물었다.

    "깔라마시여, 어떤 면에서 그대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언하십니까?"

    이에 알라라 깔라마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알라라 깔라마에게만 신심과, 정진, 마음챙김, 집중, 그리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또한 신심과 정진, 마음챙김, 집중, 그리고 지혜가 있다. 그러니 나도 알라라 깔라마가 단언하는 그와 같은 경지를 얻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였다.

    오래지 않아 매우 빨리 나는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 나는 알라라 깔라마에게 가서 물었다.

    "깔라마시여, 그대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다고 단언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까?"

    "바로 그것이오, 벗이여."

    "깔라마시여, 나도 또한 지혜로 깨달아 가르침을 성취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함이요. 벗이여, 청정한 삶에서 존자님과 같은 동료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유익함이요. 내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그대도 똑같이 깨달았소.

    또 그대가 지혜로 스스로 깨달은 경지를 내가 똑같이 깨달았소. 내가 성취한 가르침을 그대가 성취하였고, 그대가 성취한 가르침을 내가 성취하였소. 그대가 아는 가르침을 내가 알고 내가 아는 가르침을 그대가 알게 되었소. 그러니 벗이여, 나와 함께 이 공동체를 이끌어가면 어떻겠소?

    이와 같이 나의 스승인 알라라 깔라마는 자신의 제자인 나를 그와 대등한 지위에 놓았고 최고의 존경을 표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가르침은 깨어있음, 욕망의 소멸, [번뇌의] 소명,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고 오직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머문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떠났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공경할 줄 아는 이는 예의와 질서가 있고

    그로인해 안락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잡아함경)

     

     

    따뜻한 흉터!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구석에 숨어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날도 소달구지 밑에서 놀고 있던 나는 갑자기 달구지채가 내려앉으면서 허리를 찍어 눌렀다.

    처음엔 너무 놀라 아픈 줄도 몰랐다. 부모님은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안 아프다고 볼멘 소리를 하고 나서야 일주일 만에 학교에 갔다.

    어정쩡한 걸음으로 교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이 한달음에 달려와 물었다.

    "얼마나 아픈 거니"

    "……괜찮아요."

    "괜찮은데 일주일이나 학교를 빠지니? 어디 한 번 보자."

    선생님은 내 허리춤을 걷어 올려 상처를 살펴보셨다.

    "어머나, 세상에! 정말 아팠겠다."

    선생님의 말에 나는 왈칵 눈물이 솟았다. 부모님에게 혼날까봐 꾹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터져버린 것이다.

    "안 아파요"를 연발하는 나를 선생님은 꼭 안아주셨다. 사실 그 당시 나는 꽤 많이 다쳤던가 보다. 지금도 내 허리에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하지만 흉터를 볼 때마다 아픔보다 선생님이 꼭 안아주던 따듯함이 먼저 떠오른다. 흉하지만, 따듯하고 아름다운 상처이다.

    나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사랑의 증표.

    당신에게 상처를 보듬어줄 단 한 사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이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줄 단 한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치료하지만 흉터는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흉터가 따듯해질 때 당신도 나도 세상도 모두 행복해집니다.


    BBS 라디오 '아침풍경' 진행자 원영 스님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들> 중에서

     

     

    사랑과 욕심을 쫓아 걱정이 생기고 걱정을 쫓아 두려움이 생긴다.

    만일 사랑을 떠나 버리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사십이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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