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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수행 / 종범스님
공부와 수행 / 종범스님
의외로 젊은 사람들 중에도 할 일이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요즘은 대부분 바쁘다고 하고 다 바쁜 줄 알았는데
할 일이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예전에 어느 절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보살님이 “스님께서 얼마나 심심하겠느냐?”며
같이 놀아주고 가겠노라며 가려고 하질 않는 것이었다.
책도 보아야 하고 해야 할 일도 있는데 가질 않으니까 미칠 노릇이었다.
도대체 심심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이것은 공부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공부할 줄 아는 사람은 절대 심심할 수가 없고 할 일이 없을 수가 없다.
공부 안하는 사람이 할일이 없고 심심한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뜻 그대로 노력한다는 것이다.공부는 왜 필요한 것인가? 공부를 통해서 여러가지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첫째로 학습이다. 배우고 익히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본래 학습이라는 말은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데, 유가의 용어이다.
‘학이시습지면(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라는 말이 있다. ‘
배우고 항상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이다. 배우고 익히는 재미는 굉장한 것이다.
배운다는 것에 대해 주자가 해석을 달기를 ‘학지위언(學之爲言)은 효야(效也)라’즉, ‘배운다는 것은 본받는 것이다.’라 하였다.
다른 사람이 해 놓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다른 사람의 것을 내가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배우지 않고서는 되질 않는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몇 천년동안 노력해서 만든 것을 배우면 금방 활용할 수 있지만 배우지 않으면 못한다.
습(習)에 대해서는 ‘조삭비왈(鳥數飛曰) 습(習)’이라 하였다.
새가 날개가 돋았을 때 처음부터 잘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연습을 하고 또 해야 비로소 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학습이 깊거나 넓지 못하면 절대 인재가 되지 못한다.그러므로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중요하다.
경전도 학습을 해야 알게 되고, 역사도 학습을 해야 알게 되고,
음식 하나를 만들어도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는 만들 수가 없다.
한국에 역대로 큰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 스님들로부터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화엄경이 아무리 대단해도 학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며,
금강경이 아무리 영험이 있다 한들 학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떤 이가 큰스님께 찾아가 여쭙기를
‘금강경이 영험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영험이 있습니까?”하였다.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영험이 없다.”고 하셨다 한다.
그러자 왜 없는지를 다시 여쭙자 “금강경을 읽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외지도 않고
저 높은 서가에만 올려다 놓기만 하면 영험이 있겠는가?”라 하셨다 한다.
제아무리 좋은 음식도 먹지 않으면 도움이 되지 않듯,읽지 않고 놓아두기만 하면 종이일 뿐이요 글자일 뿐이다.
아무리 역사가 깊고, 사상이 깊고, 전통이 좋아도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것으로 될 수가 없다.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만 자기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배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습과 지식은 함께 가는 것인데, 학습이 넓으면 지식이 넓다.
지식이라는 것은 결국 밖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지식은 남의 일’이라 하기도 한다.
가령 의상스님께서 화엄경을 연구해 놓으셨는데, 그것을 학습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찌 알 수가 있는가.그러므로 원효나 의상스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 외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학습을 했다고 해서 자기의 생각이 학습된 내용과 일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더 발전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기화되는 공부 즉, 관조(觀照)공부가 필요하다.
관조라는 것은 다른 데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관(觀)에 대해서 금강경에서는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응당 이와 같이 보아라.
모든 세상 사물이 과거는 다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생각은 그림자와 같고 우리의 몸은 이슬과 같고 현재사는 번개와 같다 하였다.
이렇게 인연법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여래가 어디서 왔는가 하고 살펴보면 오는 곳이 없고,어디로 가는가 살펴보면 가는 곳이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는 관자는 과거, 현재, 미래와 동서남북, 천상천하 이 시간공간을 전체 다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넓게 보는 것을 보관(普觀)이라 하고 보관공부라는 것이 있는데,
넓게 본다는 것은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매일같이 태어나고 시시각각으로 매일같이 돌아가시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태어나고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온 곳은 어디이고 가는 곳은 어디인가? 이렇게 넓게 관찰하는 것을 보관이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한 생각에 무량겁의 세월을 관찰해 보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이것이 인연법이다. 끝없이 오지만 와도 오는 것이 아닌 불생(不生)이고 무생(無生)이다.
사라져도 사라지는 것 없이 사라지므로 무멸(無滅)이라 한다.
넓게 관찰하면 무생 무멸을 본다는 것이다.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계속 생기지만 생기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넓게 관찰하면 도대체가 걱정근심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찰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이다.
관찰하는 공부를 하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훤히 알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어느 때는 들뜨기도 하고, 어느 때는 슬프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불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똑같다.
그러한 것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재능과 감정이다.
부모들이 크게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에게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엄청 노력하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 재능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고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한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엄청난 사고를 저질러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재능과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이 함께 있어야 한다.
화가 나면 반드시 이유가 있는데, 만일 바람이 불어서 화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또는 누군가가 떠들어서 화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또 누군가가 미워서 화가 난다면 그 사람과 싸워서 해결해야 할까?
만약 싸워서 행복해지리라 해서 싸움을 해보면 행복해지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이 나빠진다.
그러므로 싸워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싸움 없이 해결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싸움 없이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억눌러서 참아야 할까?
참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다. 참다보면 여러가지 병이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자기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서 살피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이것을 각조(覺照)라고 하는데, 섭
섭한 마음이 들면 ‘내가 지금 섭섭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구나’라고 비추어 보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 각(覺)이고, 그 마음을 비추어 보는 것이 조(照)이다.
그러고나면 그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섭섭해 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예전부터 알던 사람을 찾아갔는데
잘 대해주리라 생각했건만 잘 대해주지 않아서 서운했다고 하자.
그 서운한 마음이 든 이유는 잘 대해주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분노는 욕심으로부터 비롯된다.
기대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기대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욕심으로 자기가 화를 내고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돌아보고 챙기는 것이 각조공부이다.
카리스마라는 말이 있는데 재능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재능이 없으면 카리스마가 있을 수 없고 멸시를 받는다면 카리스마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카리스마만 가지고 행복할 수는 없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각조공부를 하지 않으면 되지를 않는 것이다.
처음엔 화가 난 다음에 좀처럼 모른다.자기가 화를 내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 때 큰 사고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자꾸 하려고 노력하면 조금 있으면 알게 되고, 나중에는 더 빨리 알게 되고,
더 공부하면 화가 날려고 할 때 알게 된다.
화는 알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알아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전혀 화를 안내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실제로는 마음을 챙기는 것이 빠른 사람이다.
처음에는 불이 난 다음에 불을 끄는데 나중에는 불이 조금 났을 때 끄고
나중에는 불이 날려고 하면 꺼버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불이 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일어나는 마음을 자꾸 챙겨보고 챙겨보면 소멸한다. 그래야 감정조절이 되는 것이다.세번째 공부는 수련이다.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 수련이다.
더러운 옷가지를 빨아내는 것이고 쇠붙이를 담금질하는 것이 수련이다.
배우고 익힌 것을 한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학습공부, 각조공부, 수련공부 이러한 공부하는 것이 몸에 벤다면할 일이 없고 심심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할 것이 너무 많고 배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되면 심심한 것이 절대 있을 수 없고, 시간이 남는 것이 절대 있을 수 없다.
수행에 대해서 보자면, 수행도 공부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는데,
공부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자기를 성숙시키는 노력이지만
수행이라 하면 자기를 위한 일도 수행이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일도 수행이다.
예를 들면 화엄경 입법게품에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배우고 익혔는데 이것이 공부이다.
보현행원(普賢行願)에 보면
보현보살이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원하여 열가지 서원을 닦는데,
그 열 가지 서원을 보면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 업장을 참회하는 것,
공양하는 것, 법문을 청하는 것, 회향하는 것 등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다 나온다.
그래서 대표적인 수행으로 보현행원수행을 꼽는다.
선재동자가 스스로 스승을 찾아서 노력하는 기간까지는 공부수행에 해당하고,
보현보살이 십대행원을 닦아가는 것은 자리이타를 겸한 수행인 것이다.
수행은 자기를 위한 일도 수행이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일도 수행이므로보시하는 것, 공양하는 것, 부처님을 잘 모시는 것, 회향하는 것 모두가 수행인 것이다.
보시하고 공양하는 것을 공부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공부는 스스로 수련하고 반조하고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공부와 수행이 항상 있어야 한다.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해야지 마음에 만족도가 생기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허할 뿐이다.
공부하는 사람의 행복은 마음에 늘 충만감이 있다.
학교에서도 보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은 허탈한 마음이 없지만 공부를 적게하면 허탈하다.마음이 허탈하면 공연히 학교나 교수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기대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학교나 교수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게 된다.
국가에 대해 욕을 많이 하는 사람 치고 애국자는 없다.
진정한 애국자는 나라에 대한 기대보다 나라에 대한 걱정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 효자 중에는 부모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효자는 부모에 바라는 마음보다 부모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학습과 공부가 있어야 자기 충족감이 있는 것이고, 수
행과 공부가 함께 겸해져 나갈 때 자기 충족감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수행 중에는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서원하는 행원수행도 있고,무념수행도 있다. 이것은 선에서 하는 방법인데, 쓸데없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이다.
쓸데없는 마음을 망념 혹은 망상이라 하여 번뇌라 하는데
이런 허망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왔고 이것은 무엇인가?
될 수 없는 것을 되도록 바라는 것이다.예를 들자면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 존경하지 않으면서 존경 받기를 바라는 것,
많이 먹으면서 날씬해지기를 바라는 것, 돈은 많이 쓰면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미운 짓을 하면서 귀여움 받기를 바라는 것, 등이다.
무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듯 허망한 망념을 일으키는 일이 없으면 무념이다.‘내가 망념을 일으키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망념이다.
그냥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무념이다. 무념이면 바로 성불이라 하였다.
그래서 무념성불이라 하는데, 이것은 방법도 순서도 없다고 하여 돈오(頓悟)라 한다.
망념이라는 것은 집착인데, 집착은 애증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서 모든 감정이 생겨난다.내가 미워하는 것이 실제로 나쁜 것이 아닌데 스스로 미워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실제로 좋은 것은 아닌데 스스로 좋아하는 그러한 망념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무념이고 무념이면 바로 성불이다.
이것이 견성이다. 견성이란 본성을 본다는 뜻인데,보조스님께서는 “다만 알 것이 없는 줄을 알면 견성이다.”하셨고,
또 어떤 분은 “모를 줄 알면 견성이다.”라 하셨다.
이 세상에는 보면 보는 데로, 들으면 듣는 데로 일 뿐 그 이상 알 것이 없다.반야심경에서도 이 세상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무소득(無所得)이라 하였다.
이 세상에 얻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얻으려고 하는 것이 다 망상이다.
얻어도 얻어도 무상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큰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와도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중생들은 끊임없이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망상중의 망상이 얻으려고 하는 생각이다.
중국의 대주 혜해선사께서는
견성에 대하여 “견성(見性)이란 견(見)이 곧 성(性)이다.”라 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데 보는 것이 바로 자성(自性)이라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 보는 것이 바로 자기의 자성이라는 것이다.
‘약무자성(若無自性)이면 불능견(不能見)’ 만약 자성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우리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 본성인데, 견성이라는 것은 볼 때 보는 것만 하고
그기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성불이다.
우리는 보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기에 집착을 해서 망념을 일으키므로 중생이다.
듣되 듣는 것으로 족하면 지혜이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선정이다.이것을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한다. 정혜쌍수면 부처님이고 그것이 무념수행이다.
이렇게 수행은 정혜쌍수하는 무념수행도 있고, 행원을 닦아가는 행원수행도 있다.이런 수행을 계속 하는 것이 바로 불자가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다.
학습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것은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학습을 통해서 자기의 세계가 엄청나게 넓어지게 된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노력을 통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지공부와 수행이 없으면 허탈해져서 자꾸 의존심이 생기고 의존하면 할수록 서운한 마음은
더 생기게 되며 서운한 마음이 생기면 분노하게 되고 그래서 흔들리는 것이다.
공부와 수행을 계속 해나가면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말은 사라지고그대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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