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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악산 오세암의 가을 풍경
    사찰 풍경 2014. 10. 14. 23:54

    2014년 10월12일 이른 새벽부터 오색에서 출발 대청봉 넘어 봉정암을 지나고 오세암에 도착하니 점심 시간이 되었다.

    맑은 가을 날씨속에 햇살에 빛나는 오색 단풍으로 오세암 일대는 빛나는 일대 화장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롱한 오색 단풍으로 오세암 일대가 온통 화사하고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래를 향해 마음을 달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잡아함경)

     

    너희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릴 줄 알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항상 안락하다.

    (잡아함경)

    악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악한 자도 복을 만난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선한 이도 이따금 화를 만난다.

    내게도 업보가 오지 않으리라 라고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법구경)

     

     

    경전을 조금밖에 외울 수 없더라도 진리대로 실천하고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해탈을 얻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매이지 않는 이는

    진실한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다.

    (법구경)

     

    지난날의 일을 참회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리라.

    (법구경)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 대사가 이룬 한글 창제의 진실!'

     

    세종의 찬불가!

    "세종이 불단에 곤룡포 두 벌과 침향 한 봉을 올렸던 것도, 신미와 김수온이 삼존불(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 예참문을 지어 바쳤던 것도 바로 그날이었다.

    세종이 불단에 친히 곤룡포를 올리는 모습은 내불당 마당에 도열한 이백육십일 명의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신하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유신들이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금이 공개적으로 부처에게 귀의하는 장면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세종이 지은 일곱 곡 아홉 장 중에서 아홉 장 일 절의 찬불가 가사는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시방 세계에 항상 계시는 삼보님

    수승한 공덕 끝이 없어라

    크나큰 평온과 대자대비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시네

    나 이제 마음 바쳐 귀의하오니

    전도된 업장 소멸케 하소서."

    낙성식이 끝나갈 무렵에는 더욱 놀라운 일이 나타났다. 삼존불의 불상이 등롱의 불빛처럼 환하게 방광을 했다. 영롱한 사리 두 과도 출현했다.

    대군들과 신미는 세종의 신심에 부처가 응답한 이적이라고 믿었다. 한때 마음속으로 세종을 비방했던 몇몇 신하들이 참회하기도 했다.

    크게 감동을 받은 세종은 이때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김수온에게 명했다. 김수온이 심혈을 기울여 세종에게 지어 바치니 그 책이 바로 『사리영응기』였다.

    낙성식 전후로 성 안 백성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백성들은 세종이 작곡한 거룩한 찬불가를 부르면서, 장엄한 봉불 공연을 보면서, 신미의 법문을 들으면서 극락정토에 와 있는 듯 모두가 환희심을 냈다."

    [태조 이성계 곁에 무학 대사가 있었다면, 세종대왕 곁에는 신미 대사가 있었다. 한글 창제의 공을 숨긴 신미 대사와 부처님 마음으로 월인친강지곡을 지었던 세종대왕 이야기]

     

    - 정찬주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중에서

     

     

    어른을 존경하고 어진이를 받들며 가르침을 받으면

    오래 살고 아름다워지며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진다.

    (법구경)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하니

    사람 가운데 영웅이라 한다.

    (법구경)

    언제나 깨어 있어 잘 깨닫는 그는 부처님의 제자다.

    낮이나 밤이나 자비를 생각하고 한 마음으로 자비를 즐긴다.

    (법구경)

     

    마음에 좋고 나쁜 것을 따지지 마라.

    좋은 것에서부터 슬품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고 속박이 생겨난다.

    (법구경)

     

     

    병든 사람을 문안하는 것은 나(부처님)를 문안하는 것이요.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은 나를 간호하는 사람이다.

    (증일아함경)

     

    몸소 체험해 보지 않았다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좋은 글귀를 잘 외워도 이익될 것 없고.

    훌륭한 것이 없다.

    목동이 주인의 소를 아무리 많이 세어도

    자기의 소는 한 마리도 없는 것과 같다.

    (증일아함경)

     

    마음은 쉬지 않고 나무 사이를 타고 다니는 원숭이와 같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안정시키고 항복 받아야 한다.

    (증일아함경)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신미의 고민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범자의 자모(字母) 원리를 빌리되, 단순하여 쓰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우리 글자를 창안하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종과 신미가 꿈꾸는 조선의 글자였다.

    세종의 말대로 신미와 함께 만들고 있는 글자로는 이 세상의 어떤 소리도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었다. 봄비처럼 보슬보슬 속삭이듯 내리는 소리나, 소나기처럼 주룩주룩 쏟아지는 소리도 물론이려니와 가을비처럼 추적추적 낙엽을 적시는 빗소리도 가능했다.

    신미가 사는 방법은 세종의 그림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 글자가 완성되는 날에도 세종은 신미의 이름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신미를 죽이는 일이었다. 세종이 신미를 살리는 일은 신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 글자 창제(創制)에 있어서 창(創)은 세종, 제(制)는 신미의 몫이었던 것이다.

    세종이 신미에게 하사하고 싶었던 심중의 말은 우국이세(祐國利世)였다. 우국이세란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었다. 세종이 신미에게 주려 했던 우국이세의 실체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였다."

    [태조 이성계 곁에 무학 대사가 있었다면, 세종대왕 곁에는 신미 대사가 있었다. 한글 창제의 공을 숨긴 신미 대사와 부처님 마음으로 월인친강지곡을 지었던 세종대왕 이야기]

     

    정찬주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중에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재물을 덜어 널리 베풀어도

    한 순간도 미련을 남겨 후회하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벗을 만나 피안에 이르러 즐거우리라.

    (증일아함경)

     

     

    만약 너희들에게 두려움이 생기거든 나를 생각하라.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지리라.

    (증일아함경)

     

    사람이 본래 악한 것은 아니지만

    악한 사람과 가까이 친하게 되면

    뒷날에 반드시 악행에 물들어

    좋지 않은 이름이 세상에 퍼진다.

    (증일아함경)

     

     

    보시는 세상의 양식이 되거니

    반드시 궁극적인 곳으로 가게 되리라.

    착한 신장이 언제나 그를 돌보고

    또 언제나 기뻐하네.

    (증일아함경)

     

     

    낮과 밤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세월의 빠르기는 번개와 같으니

    사람의 목숨 빠르기도 그러하다.

    (출요경)

     

    삿된 방법을 생각하지 말라.

    바른 생각으로 행하지 않으면 비록 재산을 얻더라도

    밤낮 근심하고 걱정한다.

    (출요경)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이 민첩하여 하나를 들으면 만을 알고

    장래 일을 미리 예측하며 순간순간의 행동이나 판단에 막힘이 없다.

    (출요경)

     

     

    정해진 업을 피할 수 없다면/

     

    "상황이 매우 위험할 때에는 간절히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쉽게 감응하신다. 만일 어려운 상황을 면하려거든 오직 삼가 불보살의 명호를 부를지어다.

    위험할 때나 평상시나 늘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도움이 된다. 업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정해진 업을 피할 길이 없어 그 업을 기꺼이 받아들여 죽음을 맞이한다면 비록 폭탄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

    사람들은 제명에 죽음을 맞이한 경우에만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일념으로 불보살의 명호를 부른다면 비록 전쟁으로 죽음을 맞이한 경우라 할지라도 불보살이 그들을 반드시 맞이할 것이다. 아무런 고통 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서방정토는 아무런 고통도 없고 오직 즐거움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곳은 의식의 문제도 없으며 거처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언제나 불보살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가장 좋은 일이다.

     

     

    어떠한 사람도 응당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해야 한다.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기 위해 전전긍긍해 한다면 오히려 환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고 서방정토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바세계는 본래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다. 진실로 편안해지고 싶다면 눈앞의 현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원대한 시각으로 서방정토를 염원해야 할 것이다."

     

    - 마음 없는 시대에 참사람이 되고자 한 홍일 대사의 사유록, 중국 역사를 바꾼 근대 4대 고승1, 홍일 대사의 <그저 인간이 되고 싶었다> 중에서

    올바른 사람과 함께 노닐고 일하며

    올바른 사람의 법을 이해하면

    그는 훌륭하고 악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잡아함경)

     

     

    선악의 결과는 오직 자신만이 받게 될 뿐

    부모나 형제가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항상 덕스럽고 깨끗한 행동을 한다면

    결과에 대해 두려워할 것은 없다.

    (출요경)

     

     

    나를 헐뜯는 말을 들은 뒤에 그것을 갚는다면

    그 원한은 끝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약하지만 참으면 강한 것이요.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출요경)

     

     

    분노를 끊으면 편안히 잘 수 있고

    분노가 없어지면 걱정이 없다.

    분노는 모든 독의 근본이지만

    수행자는 분노를 없애 편안함을 얻는다.

    (출요경)

     

    오세암 전설

    한 중이 부모 잃은 어린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키운다.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중이 월동 준비를 하기 위해 아이만 암자에 남겨둔 채 마을로 내려간다. 중이 양식을 구해 암자로 가려고 했으나 폭설 때문에 갈 수가 없어서 눈이 녹기만을 기다렸다. 이른 봄, 눈이 녹기 시작하자 중은 서둘러 암자로 올라갔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중이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자 어머니(관음보살)가 매일 양식을 주었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의선녀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경전을 주고 청조(靑鳥)가 되어 날아갔다. 아이가 오세에 득도하였다고 하여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세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세암

    이 절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ㆍ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고, 옛 절터가 근처에 있어 석물(石物)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마등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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