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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흐르고 꽃 피어난다.뱀사골 풍경
    풍경사진 2013. 5. 1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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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 흐르고 꽃 피어난다
                                                              / 법정 스님
          한동안 집을 비우고 밖으로 나돌다가 돌아오니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턱 밑에 웬 발레들이 득실거렸다. 
          모양은 노래기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역겨운 노린내도 나지 않는 그런 벌레다. 
          몇 차례 쓸어내도 줄지 않았다. 
          개울에서 부엌으로 끌어들인 수도를 
          날씨가 풀려 다시 이어 놓았는데 
          그 전보다 물줄기가 약했다. 
          가물어서 개울물이 줄어든 탓이려니 했다. 
          문턱 밑에서 벌레를 쓸어내다가 문턱을 만져 보니 
          전에 없던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었다. 
          아하, 문턱 밑에 무슨 변고가 생긴 모양이구나 싶어
          시멘트로 바른 문턱 밑을 파냈다. 
          수도관이 터져 물이 펑펑 새고 있었다. 
          얼음이 얼기 전에 개울물에서 끌어들인 수도를 끊어 놓는 것이 
          초겨울 이 오두막의 연중행사인데, 
          지난 겨울이 너무 추워서 
          수도관에 남은 물이 얼어서 터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수도관이 터진 줄도 모르고, 
          물줄기가 약해진 것을 가뭄 탓으로만 돌릴 뻔했다. 
          득실거리던 벌레들에게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유도 모르고 귀찮게 여기면서 쓸어 내버린 일이 
          미안하게 여겨졌다. 
          망가진 수도관을 잘라내고 이어 놓으니 
          물줄기가 다시 살아났다. 
          벌레들도 이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가뭄 탓만 하면서 
          찔찔 거리는 물로 불편하게 지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벌레들이지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고 있는 인연으로 
          내게 말 없는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이래서 꿈틀거리는 미물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 것이다. 
          고랭지인 이곳은 5월 하순인 요즘에야 
          철쭉이 수줍게 문을 열고 있다. 
          5월 초순께 벼랑위에서 붉게 타오르던 진달래의 뒤를 이어 
          철쭉이 피어나고 있다. 
          고랭지의 꽃은 그 빛깔이 너무도 선연하다. 
          남쪽이나 중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산뜻한 빛이다.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께 피어나는 때늦은 모란도 
          그 빛깔이 너무도 선연해서 돌아서기 아쉽다. 
          고랭지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유리하우스를 보면서 
          왜 하필이면 추운 지방에서 꽃을 재배할까 늘 의구심이 일었었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꽃 빛깔을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어찌 이게 꽃만이겠는가.
          사람의 일도 이에 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집안과 그 환경이 풍족해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체격도 좋고 얼굴도 희멀쑥하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어쩔 줄을 모르고 이내 주저앉고 만다. 
          한마디로 의지력이 약하다. 
          체격은 멀쑥하지만 그 체질과 기질은 나약하다. 
          그들은 온실 속의 꽃이나 다름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온실의 관리인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스스로 딛고 일어서는 의지를 키울 수 없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대개 이기적이다. 
          참고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자가밖에 모른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자가 마음대로 한다.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이래서 인간미가 없다.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면 
          무엇이든지 그들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라는 말이 있다. 
          미래의 인간은 아마 현재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나약할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 추세로 미루어 능히 예측할 수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소위 일류대학 출신들은 대부분 덜 인간적이다. 
          인간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일류만을 지향하면서 
          비정한 경쟁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인간적인 폭이나 여백이 생길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 선민 의식에 도취되어 이기적인 벽에 갇히기 쉽다. 
          그들한테서는 인간다운 체취를 맡기 어렵다. 
          그러나 세칭 이류나 삼류쪽 사람들한테서는 
          보다 인간적인 기량과 저력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을 대하면 우선 마음이 편하다. 
          저쪽 마음이 곧 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후덕함과 여유가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일류가 못되고 이류나 삼류 또는 아류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랭지의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떤 꽃을 피우고 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제발 일류가 아닌 삼루나 아류의 꽃이었으면 좋겠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 모진 추위와 비바람과 뙤약볕에도 꺾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뎌낸 그 인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소로우의 일기》에서 소로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
          앞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한바탕 쓸고 닦아냈다.
          아침나절 맑은 햇살과 공기 그 자체가 신선한 연둣빛이다.
          가슴 가득 연둣빛 햇살과 공기를 호흡한다.
          내 몸에서도 연둣빛 싹이 나려는지 근질거린다.
          새로 피어난 자작나무 어린잎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춤을 추고 있다.
          개울물 소리는 장단을 맞추며 흐른다.
          개울 건너에서 검은등뻐꾸기도 한몫 거들고 있다.
          철쭉이 벼랑에서 수줍게 웃음을 머금고 있다.
          이곳이 어디인가.
          바로 극락정토가 아니겠는가.
          그윽한 즐거움이 깃드는 곳.
          물 흐르고 꽃 피어나는 바로 그곳이 
          극락정토 아니겠는가.
          극락세계를 다른 말로 
          ‘한 없이 맑고 투명한 땅(無量淸淨土)’
          또는 ‘연꽃이 간직된 세상(蓮華藏世界)’이라고 한다.
          아, 하늘과 땅 사이에 물 흐르고 꽃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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