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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3월 16일 찾은 영천 은해사 풍경입니다.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그 뒤 1270년(원종 11)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하였고, 1275년(충렬왕 1)에는 원참(元旵)이 중건하였으며, 1485년(성종 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보주(寶珠) 등이 중수하였으며, 1545년(인종 1)에는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1563년 묘진(妙眞)이 중건하였고, 1589년(선조 22)에는 법영(法英)이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백흥암(百興庵)과 명부전(冥府殿)을 신축하였으며, 1667년(현종 8)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절 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으며, 1730년(영조 6)에는 백흥암의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다.
1737년에는 법당·누각·천왕문 등을 단청하였고, 1750년 법당의 아미타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759년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1761년에는 천왕문을 세웠다. 1767년에는 백흥암의 영산전(靈山殿)을, 1772년에는 설화(雪華) 등이 백흥암의 동대(東臺)를 쌓았고, 자암(慈庵)은 대웅전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도봉(道峰)은 영산전과 시왕전(十王殿)의 불상을 개분(改粉)하였다.
1780년(정조 4)에는 혜옥(惠玉)·서징(瑞澄)·덕윤(德玧)·체주(體周) 등이 묘봉암을 중창하였고, 1785년에는 쾌민(快敏)이 거조암(居祖庵)을, 1797년에는 경옥(璟玉)·석린(碩麟)·해운(海雲)·유화(有和)·승수(勝修)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는데, 이때 운부암 조실(祖室) 지첨(知添)이 불사를 지휘하였다. 1801년(순조 1)에는 기기암(奇奇庵)을 중창하였는데 기기암의 원래 이름은 안흥사(安興寺)였다.
1816년에는 비각(碑閣)을 세웠다. 1817년에는 기봉(箕峰)·유성(宥性) 등이 서운암(瑞雲庵) 등 30여 곳에 다리를 놓았고, 1823년에는 기기암을 중수하였으며, 1833년에는 보봉(寶峯)·응암(應庵) 등이 서운암을 중창하였고, 1834년에는 우일(宇一)·유엽(有曄) 등이 중암암(中巖庵)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847년(헌종 13)에는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나서 1,000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같은 해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사방 아홉 칸의 법당과 향실(香室), 심검당(尋劍堂)·설현당(說玄堂)·청풍료(淸風寮) 등을 새로 지었다. 또 이듬해에 옹호문(擁護門)·안양전(安養殿)·동별실(東別室)·만월당(滿月堂)·향적각(香積閣) 등을 세웠으며, 1849∼1850년에 걸쳐서 보화루를 중수하였다. 1849년에는 백흥암의 중료(衆寮)를 중창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 등이 백흥암의 영산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에는 운부암(雲浮庵)이 소실되었다.
그 해 응허(應虛)·침운(枕雲) 등이 운부암을 중건하여 법전(法殿)·설선당(說禪堂)·조실(祖室)·영각(影閣)·노전(爐殿) 등을 세웠다. 또한 1869년(고종 6)에는 백흥암의 명부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는 백흥암에 나한전(羅漢殿) 및 석조(石槽)를 만들었으며, 1878년에는 백흥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다.
1900년에는 운부암의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1920년에는 석담(石潭)이 대웅전·단서각(單捿閣)·계삼당(洎三堂)·보화루·창고를 수선하고, 주지실·요사 4동 및 2대문(大門)을 지었다. 또한 구재(舊材)와 신재(新材)를 사용하여 옛 조실(祖室)을 하지전(下持殿)으로, 극락전을 응접실로 바꾸었다.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 소, 포교당 5개 소, 부속암자 8개 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4000여 평, 밭 2만8000여 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이 절은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지눌(知訥)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홍진국사가 머문 뒤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서 사격(寺格)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影坡)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산령각(山靈閣)·설선당·심검당·단서각·종루·보화루·승당·요사채·객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1999년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秋史)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3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 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