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국보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나의 이야기 2021. 8. 16. 00:21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국보28호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입니다.

    이차돈의 순교 사찰로 알려진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던 불상을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이전해 전시하고 있는 국보입니다.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에 위치한 신라의 명찰 백률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이다. 사람의 크기와 같은 크기이며, 인체 비례를 따르고 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최대의 금동불상으로 조성 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800년 전후 추정, 높이 177㎝, 국보 제2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유형유물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성격불상소장처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수량1점재질금동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높이 177㎝소유자백률사관리자국립경주박물관문화재 지정번호국보 제28호문화재 지정일1962년 12월 20일목차정의개설내용의의와 평가정의통일신라시대의 불상.개설국보 제28호. 높이 177㎝.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래는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金剛山) 중턱에 위치한 신라의 명찰인 백률사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1930년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등신대(等身大)의 이 금동불상은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이다.내용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 비례에 가깝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원형이다. 그리고 긴 눈썹, 가는 눈, 오뚝한 코, 작은 입 그리고 늘어진 뺨의 살, 턱에 묘사된 군살 등 비교적 우아한 용모를 하고 있다. 하지만 긴장과 탄력성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얼굴은 8세기 중엽경의 이상적 불안(佛顔)에서 진전된 것으로, 불상의 편년 설정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신체는 하체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묵중해지고 있다.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 뒤로 젖혀진 상체와 함께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우람한 체구를 과시하고 있지만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되었다. 가슴은 비교적 넓고 양감(量感) 없이 밋밋한 편이다. 어깨의 굴곡은 밀착된 불의(佛衣) 위로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굴곡은 허리에서도 나타난다.대의(大衣)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터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의 표현은 비교적 잘 드러나도록 처리되어 있다. 두 손은 보수된 것이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오른손은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왼손은 가슴 부근에서 평행으로 두면서 약호(藥壺)를 살짝 들게 한 것 같다. 두 발은 하체의 체구처럼 우람하고 당당한 모양이다. 발가락과 발톱의 표현은 비교적 세세한 편이다.통견(通肩)의 불의는 가슴에서 U자형으로 트여 있다. 옷주름은 비교적 간략하지만 U자형의 옷주름이 하체에 성글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씩 엇갈리면서 중심이 끊어지는 독특한 모양으로 처리되어 있다.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보물 제159호)불과 비슷한 것이다.두 팔에서 내려진 옷자락과 발 위에 묘사된 옷자락은 묵중하여 중후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이 불상의 선묘 특징은 단순하면서도 중후한 묘법으로, 형태적 특징과 함께 이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의의와 평가이 불상의 우람한 신체는 얼굴의 특징과 함께 801년에 조성된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과 상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은 불의와 불의의 선묘적(線描的) 특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성 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참고문헌「신라하대 불교조각의 연구(1): 방어산 및 실상사 약사여래거상을 중심으로」(문명대, 『역사학보』73, 역사학회,[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慶州栢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약병을 들고 있는 불상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황룡사지 출토 금동약사여래입상깨달음을 이루는 것만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길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약을 복용하기 위해서는 약사(藥師)를 찾아 간다. 불가(佛家)에서도 이러한 역할을 하는 불상이 있다. 약사불이다. 알다시피, 원시(原始)불교나 부파(部派)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대승불교는 석가모니 붓다 외에도 다양한 붓다의 존재를 인정하였다.대승불교에서는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말한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나이란자나 강[니련선하尼連禪河, 지금의 Phalgu강]을 건넌다고 한다. 흔히 죽음을 차안(此岸, 이쪽 강 언덕)에서 피안(彼岸, 저쪽 강 언덕)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관념과 관련된다.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이 이 강을 건널 때 배를 타고 간다고 한다. 그 배에는 수레바퀴[승乘]가 달려 있다. 큰 배에는 큰 수레바퀴[대승]가, 작은 배에는 작은 수레바퀴[소승]가 달려 있다. 소승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을 믿었던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라면, 대승불교는 붓다의 가르침과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탈 수 있는 큰 배라고 할 수 있다.대승불교에서는 그 배가 가는 목적지도 다양하여 여러 정토가 생기게 되었다. 아울러 그 정토를 주관하는 다양한 붓다도 출현하게 된다. 대승불교도들이 가장 선호했던 곳은 당연히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 극락정토와 약사불이 주관하는 동방 약사유리광(藥師琉璃光)정토다.사람들은 누구나 생노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훗날 석가모니 붓다)는 이 과정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어느 날, 그는 카필라바스투국 왕성의 동서남북 네 문밖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소위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알려진 붓다의 불전담(佛傳譚, 석가모니 붓다의 일대기)에 의하면, 그는 문밖에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차례로 목격하고 마지막으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것만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임을 알게 된다.보통 사람들은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와 같은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삶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또한 살면서 병들고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다음 생(生)에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늙고 병드는 일이 전혀 없는 동방 약사유리광정토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 바램은 약사불상을 만드는 일로 이어졌다.약병을 들고 있는 불상보통 불상과 보살상을 구별할 때 보관이나 목걸이, 귀걸이 등 장식을 하고 있는지가 기준이 된다. 장식이 없으면, 불상으로 본다. 물론 손으로 아무 것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불상 중에서 한 손으로 약병이나 약호를 들고 있는 경우가 있다. 약사불상이다.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는 것을 수인(手印, 손 모양)이라고 하고, 약사불상과 같이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경우 지인(持印, 지물(持物)을 가진 손)이라고 한다.신라에서 약사불상은 7세기 중엽에 처음 만들어진다. 황룡사(黃龍寺) 절터와 영주의 숙수사(宿水寺) 절터(지금의 소수서원 자리)에서 발견된 약사불상들이 그 예다. 이들 불상은 10cm도 채 되지 않는 크기로, 개인적으로 지니고 다녔던 불상[호지불(護持佛)]이다.약사 신앙의 유행과 함께 대형의 약사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분황사(芬皇寺) 약사불상은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본피부(本彼部) 출신의 장인 강고내말(强古乃末)이 동 30만 6천 7백 근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분황사 보광전(普光殿)에는 약사여래상이 있다. 두 발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후대에 만든 것이다. 두 발은 원래 강고내말이 만든 것은 아닐까?강고내말이 만든 분황사 약사불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小金剛山) 중턱의 백률사와 인연 깊은 불상이다. 알다시피, 절 아래에는 이 절에 예불하러 올라가던 경덕왕이 땅속에서 들리는 염불소리를 듣고 발견한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석불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불상이 언제부터 백률사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금동약사여래입상 측면금동약사여래입상 후면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될 때까지 백률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광배와 대좌가 사라졌지만, 1.8m나 되는 대형 불상이다. 불상의 등 뒤와 발바닥에는 광배와 대좌를 고정하기 위한 촉이 남아 있다. 불상의 몸 전체에는 주조할 때 안틀과 바깥틀을 고정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형지(型持) 자국이 33개나 남아 있으며, 뒷면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주조공이 세로로 4개가 있다. 대형의 불상 임에도 불구하고, 그 두께가 일정하여 신라의 주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게 한다.비록 불상 조성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불교 신앙적으로나 도상적, 양식적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조성된 약사불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상에는 조성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도금 흔적과 조선시대의 채색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입상 형식의 대형 금동불상으로는 유일한 예다. 8세기 후반,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금산사(金山寺) 장육미륵상(丈六彌勒像)에 대한 조성 기록은 이 무렵에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더욱더 높여 준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팔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와 원만한 상호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숭고한 종교성마저 가지고 있어서 고도로 숙련된 장인의 관찰력과 표현력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금동약사여래입상 불두 뒷면[삼국사기]에 의하면, 8세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기근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병들거나 죽었다고 한다. 병들고 죽는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이때 신라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혹한 경험을 하였다. 그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보다 바로 병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약을 주거나 병들어 죽은 후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약사유리광정토에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것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만들었던 것이 바로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 약병을 들고 있는 불상 (문화유산 알아보기, 배재호,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