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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 삼존상
    사찰 풍경 2021. 8. 15. 23:45

    경주 남산 애기부처로 널리 알려진 보물 제 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 미륵여래 삼존상입니다.

    온화하고 따스한  부드러운 미소가 아름다운 삼존불입니다.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불삼존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남산 삼화령 미륵불상

    하늘의 두 개의 해, [도솔가]를 지어 재앙을 막다

    육법공양()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을 공양하는데 쓰는 여섯 가지 물건이다. 향, 등, 차, 꽃, 과일, 쌀이 그것이다. 육법공양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8세기 중엽에 제작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 있는 연기()법사의 발원문에서 처음 나온다. 요즘도 불상 앞에 이들 여섯 가지 공양물이 놓인다. 등이나 꽃 공양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붓다께서 인간 세상에 계실 때부터 있어 왔지만, 차 공양은 아마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생겼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향 공양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고구려의 묵호자()가 선산의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신라에 불교를 전하던 때에 보인다. [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에서와 같이 차 공양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늦은 8세기 중엽에 충담()스님의 이야기에서 처음 확인된다.

    즉, 경덕왕이 3월 3일, 귀정문() 누각 위에서 다구[]가 담긴 통을 둘러메고 오는 충담 스님을 본다. 경덕왕이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충담스님은 해마다 중삼일[, 3월 3일]과 중구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에 계시는 미륵세존()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미륵불상에 차를 공양하였다는 기록는 [산화가()]를 지은 월명()스님과 얽힌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산화가]는 미륵불상에게 꽃을 공양하는 내용의 향가다.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 )’에 의하면, 경덕왕 때인 760년 4월에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떠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자 월명스님을 불러 그 재앙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월명스님은 [도솔가]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청운에 한 떨기 꽃 뿌려 보냈네.
    龍樓此日散花歌 桃送靑雲一片花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를 맞았네.
    殷重直心之所使 遠邀兜率大僊家“

    [도솔가]를 부른 후에 그 재앙이 사라지자, 왕은 월명 스님에게 다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주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동자가 그것을 받아서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왕이 그의 뒤를 쫓게 하였는데, 동자는 내원()의 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다구와 염주는 내원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상 앞에 놓여 있었다.

    남산 삼화령 석조불삼존상. [도솔가]를 부른 후에 재앙이 사라지자, 왕은 월명 스님에게 다구 한 벌과 수정 염주 108개를 주었는데 순간 홀연히 나타난 동자가 그것을 받아서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다구와 염주는 내원 남쪽 벽에 그려 놓은 미륵보살상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충담스님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 공양을 올렸다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세존은 어디에 있을까? 남산 삼화령에는 충담스님이 차를 공양하였을 법한 미륵불상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은 1925년, 삼화령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온 미륵불삼존상이 바로 이 불상이라고 생각한다. 100여 년 전의 사진을 보면, 삼화령 석실 속에 이 불상과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화령 미륵세존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삼국유사] ‘생의사 석미륵( )’에서 확인된다. 즉 선덕여왕 때에 도중사() 승려 생의()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서 풀을 묶어 표시하게 하고는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청하건대 스님께서는 나를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하여 주시오’라고 하였다. 생의 스님은 꿈에서 깬 후, 그가 표시해 놓았던 곳을 찾아가 땅을 파 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그 미륵상을 삼화령 위에 옮겨 놓고 선덕왕 3년(634)에 절을 짓고 살았는데, 절 이름을 생의사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삼화령의 삼화를 세 명의 화랑으로 생각한다.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에서는 미륵여래를 화랑의 화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화가 세 명의 화랑이라면, 화랑이 미륵의 화신이므로 삼화는 결국 삼존의 미륵상이 된다. 실제로 경주박물관의 삼화령 미륵불삼존상은 명문이 없지만 주존이 미륵상 임에는 틀림이 없다.

    협시보살상

    불상이든 보살상이든 미륵상은 결가부좌한 좌상 형식으로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 미륵상은 주로 의좌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두 다리를 나란히 아래로 내리는 의좌식(), 발목을 교차하는 교각식(), 한쪽 발목을 다른 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반가식[, 반가사유상의 자세]이 있다.

    삼화령 불상은 의좌식을 하고 있는 미륵불상이다. 양협시 보살상의 대좌를 제외하곤 모두 신라 7세기 중반에 만들어 졌다. 어쩌면, 생의사가 창건되던 선덕왕 3년(634)에 이들 불상도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삼존상은 모두 미소를 머금고 있는 큰 얼굴과 4등신의 통통하고 단아한 체구를 가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도솔가]를 부른 후, 왕이 월명스님에게 준 다구와 수정 염주를 대신 가지고 간 바로 그 동자의 모습이 연상된다. 미륵불상의 오른 손에는 무엇인가 꼽았을 법한 구멍이 뚫려 있다. 미륵세존 앞에서 꽃을 공양할 때 떨어진 꽃송이를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불삼존상 -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문화유산 알아보기, 배재호,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은 경주 남산 계곡 중 한 지류인 ‘장창곡(長倉谷)’의 정상부근 석실(石室)에 있던 석조불상이다. 본존상은 1924년 10월 남산 장창곡에서 발견되었다. 이전에 먼저 옮겨져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에 보관되어 온 두 협시보살상은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오다가 본존상과 함께 완전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 삼존상은 삼국 시대 미륵신앙과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는『삼국유사(三國遺事)』의「탑상(塔像)」편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조(條)의 644년(선덕여왕 13)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미륵상을 발견하여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하였다는 기록과, 같은 책「기이(紀異)」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에 기록된 삼화령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이 불상에 차[茶]를 공양했다고 하는 ‘삼화령 미륵세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이 삼존상은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한 용모로 인해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봉안 장소라고 알려진 삼화령 또는 생의사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불상이 발견된 계곡 명칭을 붙여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세존의 설화와 ‘삼화(三花)’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 미륵불은 화랑(花郞)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신앙되어 왔다. 따라서 장창곡 미륵여래삼존상은 망자(亡者)가 화랑으로 환생하기를 염원하였고 어린 화랑을 미래불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긴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제작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자세)을 취한 본존 미륵불과 입상의 좌ㆍ우 협시보살로 총3구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의좌상 형식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5∼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였고 미륵불을 상징한 예가 많다. 이 불상의 경우 우리나라 의좌상 불상 중 시기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에 오른손은 손가락을 구부린 채 들고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쥔 시무외ㆍ여원인(施無畏ㆍ與願印)의 변형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두 협시보살은 1미터 남짓의 아담한 체구에 머리에는 삼화(三花) 보관을 쓰고 각각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서 있다. 뺨이 통통한 아기와 같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 짓고 있으며, 장식과 몸에 걸친 천의(天衣) 자락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이렇듯 어린아이의 몸 같은 4등신 정도의 단구형(短軀形) 신체 비례를 보이는 불·보살상은 중국 6∼7세기 북주(北周)시대부터 수대(隋代)에 걸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에 신라에서 주로 조성되었으므로 양식적 영향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경주 남산이라는 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의좌형 미륵삼존불이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이 반영된 대표작이라는 점, 7세기 신라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한국조각사에 중요한 학술적ㆍ예술적 위상을 지닌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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