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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나원리 5층 석탑
    사찰 풍경 2021. 8. 1. 18:16

    2021년7월31일 찾은 경주 나원리 5층 석탑입니다.

    나원 백탑이라고 하는 경주 팔괴의 하나인 신비로운 백색의 오층 석탑의 모습이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 내게 합니다.

    1300년 세월을 견디고 온전히 보존된 형태로 남아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는 탑입니다.

    경주 나원리오층석탑

    유적을 답사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그 유적과 유물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다. 그것은 같은 형태, 같은 재질의 유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른 조형 의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경주 남산과 선도산()의 화강암 불상을 예로 들어보자. 경주 남산의 경우 조각하기에 좋은 화강암이 있었기에 이를 조각하여 불상으로 만들었다. 반면 경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선도산은 신라인들이 염원하던 극락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적합한 장소였으나 주변에는 조각이 불가능한 편마암뿐이었다. 거대한 본존 아미타여래는 그대로 암반에 조각했으나 양쪽 보살상은 화강암을 산 정상까지 옮겨 조각하였다. 말하자면 경주 남산에 비하여 선도산에서 보다 적극적인 조형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경주 나원리오층석탑은 이런 점에서 경주 지역의 석탑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조형 의지로 건립된 석탑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감은사지석탑에 이어 양식적으로 더 진전된 탑이다. 나원리오층석탑은 경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형산강변에 위치해 있다. 고대 교통로가 강을 따라 성립되었듯이 신라시대에는 형산강을 따라 교통로가 자리잡았다. 형산강은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라시대 안강()을 지나 포항·울진으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의 출발지점으로, 경주를 막 벗어나는 지점에 이 절터가 위치하였다.

    나원리오층석탑통일신라, 8세기 초, 현재 높이 9.7m, 국보 제39호,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다른 화강감에 비하여 유독 흰색을 띠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탑에 이끼가 끼지 않아 예로부터 '나원백탑' 이라 하여 신라 8괴(怪)의 하나로 불렸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원리절터에서 그들의 앞으로 있을 행로의 안녕을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곳이 신라시대의 어떤 절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원리오층석탑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점이 바로 지형상의 문제이다. 나원리절터 주변에는 이러한 탑을 쌓을 만한 화강암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탑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석재들을 어디에선가 옮겨왔을 터인데, 이곳에 이처럼 큰 오층석탑을 쌓아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96년 오층석탑을 해체·수리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다. 필자는 해체 당시 석재들이 하나둘 절터에 펼쳐지는 것을 보며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큰 석재들의 크기에 놀랐다.

    해체 당시 지붕돌의 모습1층지붕돌과 2층지붕돌은 덮개돌과 층급받침이 따로 제작되어 있다.(왼쪽) 3층지붕돌에서 발견된 사리공(오른쪽).

    우선 상층기단의 면석()이다. 일반적으로 상층기단 면석은 대형탑일 경우 각 면이 두세 매, 소형탑일 경우 두 매로 분할되어 조립된다. 그러나 이 탑의 경우 한 변의 길이가 무려 395㎝에 이르는 대형 면석임에도 불구하고 분할되어 조립된 것이 아니라 각 면에 하나씩 총 네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 우리나라 석탑 부재 가운데 가장 큰 판석일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면석을 조각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이곳까지 옮겨왔을 원석()의 크기를 생각하면서 경외감을 감출 수 없었다. 또 한 가지는 1층과 2층지붕돌의 경우 덮개돌과 층급받침돌이 따로 제작되어 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신라시대 감은사지석탑이나 고선사지탑 등 초기의 석탑에서는 이 돌들을 각층 네 매씩 제작하여 조립해놓았으나 나원리오층석탑은 하나의 돌로 덮개돌과 층급받침돌을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서도 다른 석탑에 비해 가장 큰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옥개석 아랫면과 맞닿은 층급받침 윗면이다. 해체 당시 살펴본 바로는 마치 두부 자르듯 말끔히 다듬어져 있었다. 굵은 입자를 하나하나 떼어내 조각하는 화강암 조각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경이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된다. 이 밖에 해체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나원리오층석탑이 원석을 옮겨와 탑이 세워지는 장소에서 조각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구된 기단부에서 거의 원석에 가까운 큼직한 돌들과 조각할 때 떼어진 작은 돌들이 다수 발견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탑의 건립에는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 원석들이 이곳까지 옮겨져서 조각되었다는 것이다.

    도면. 나원리절터 가람배치도금당 앞에 탑이 있는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금당의 서쪽에 탑이 위치해 있다.

    도면. 호류지(法隆寺) 가람배치도경주 고선사지·황복사지와 일본의 호류지는 동쪽에 금당이, 서쪽에 탑이 위치하는 특이한 형태의 가람배치이다.

    당시 이미 성립된 전형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3층탑을 만들어도 되었을 것을, 왜 이와 같이 힘든 공정을 거치면서 까지 이 탑을 5층석탑으로 만들었을까. 그 해답은 나원리절터의 가람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절들은 탑이 금당 앞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나원리절터는 예외이다. 금당으로 생각되는 건물지가 탑의 동쪽 편에 위치해 있고 탑은 동서 축으로 나란하게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즉 동금당() 서탑(西)의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가람배치는 비단 나원리절터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주 고선사지()와 황복사지(), 일본의 경우 호류지()에서 이러한 가람배치가 나타난다. 그러나 고선사지와 나원리절터는 다른 점이 있다. 탑이 세워지는 구역을 금당이 세워지는 구역에 비하여 의도적으로 높은 지대에 마련하여 탑을 금당에 비하여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탑을 강조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상승감을 강조하는 것, 즉 층수를 높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원리석탑은 3층이 아닌 5층으로 나타낸 것일 것이다.

    도면. 나원리오층석탑 단면도

    각 층탑의 지붕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고, 5층 이상 상륜부는 깨진 노반석과 노반석 상면에서 절단된 찰주가 남아 있다. 1996년 해체·복원 당시 3층지붕돌 윗면의 가로세로 30㎝ 가량의 사리공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3층의 금동탑 1기와 9층의 금동탑 3기를 포함하여 부식된 나무탑 등이 주목되는데, 특히 3층의 금동탑은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신라시대 유일한 3층금동탑으로 지붕모서리 추녀에 달려 있는 풍경까지 전혀 손상되지 않았을 정도로 완벽하여 신라탑 복원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당시의 종이 조각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보존 처리 결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임이 확인되었다.

    경주에서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5층석탑은 나원리오층석탑과 장항리사지석탑, 이 두 탑이 전부다. 또한 이 탑의 석재인 화강암은 다른 화강암에 비하여 유독 흰색을 띠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탑에 이끼가 끼지 않아 예로부터 '나원백탑()'이라 하여 신라 8괴()의 하나로 불려졌다.

    나원리탑 사리장엄구3층지붕들 윗면 사리공에서 사리함(오른쪽)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금동의 3층탑 1기, 9층탑 3기, 금동여래입상 1구(왼쪽) 등이 출토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나원리오층석탑 (한국 미의 재발견 - 탑, 2003. 7. 1., 강우방, 신용철)

    배롱나무 꽃과 어우러진 탑이 절묘하게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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