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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사찰 풍경 2018. 7. 17. 22:46

    지리산 피아골 계곡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 연곡사입니다.

    전각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최근에 지어 졌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지 않은 석조 유물이 많은 사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의 석조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입니다.


    연곡사 북승탑


    국보 제54호. 연곡사 북쪽 산 중턱에 위치한 고려초기의 승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상륜부의 일부가 파손 복원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부표현이 정교하다. 양식으로 보아 같은 경내에 있는 동 승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변천

    북 승탑은 탑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 있지 않아 누구의 탑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경내에 고려 초에 건립된 현각선사의 탑비(보물 제152호, 979년)가 남아 있어 그의 탑일 가능성이 높다. 2001년 3월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후 복원되었다. 이때 전면()에 부착되어있던 이끼를 제거하였고 결실된 부재의 보충과 뒤바뀐 상륜부재를 바로잡았다. 동 승탑과 양식적 유사성이 있으나 세부표현에 있어 뒤떨어져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탑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상륜의 일부가 결실되었다가 수리 때 추가되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2단의 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사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운룡문과 팔각의 하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16엽의 연화문을 복련으로 새기고 여덟 연꽃의 모서리에만 귀꽃무늬를 두었다. 하대석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중대를 받쳤는데, 중대석 하단에도 2단의 각형받침을 두어 총 4단의 받침으로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 모두 안상을 새기고 내부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8구의 신장을 새겼는데, 팔부신중()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았다. 상대석은 상하 2중의 연꽃을 총 16엽으로 연꽃 잎에는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대석 위로는 비교적 높은 탑신 괴임을 두었다. 탑신괴임은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가릉빈가 1구씩을 새겨 넣었다. 괴임의 상단으로는 낮게 3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문비, 사천왕상, 향로를 새겼다. 옥개석 하단 위로는 앙곡을 주어 둥글게하고 내부에는 비천을 새겨놓았다. 지붕의 처마는 겹처마로, 상단은 기와골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는데, 막새기와 및 사래기와 등을 모각하여 사실성을 더하였다. 상륜부는 꽃 모양의 앙화 위로 보륜, 그리고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핀 봉황이 조각된 보개 및 보주로 이루어 졌는데 봉황의 머리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가운데 보륜 1매는 2001년 보수 당시 새로 만들어 추가했다.




    연곡사 동승탑(국보53호)


    탑이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면, 승탑은 유명했던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이다. 승탑의 구성은 석탑과 같아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다.

    이 승탑은 연곡사의 동쪽에 네모난 바닥돌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구례 연곡사 북 승탑(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 승탑은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승탑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곡사 동승탑 비(보물제 153호)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연곡사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승탑이 3개 있는데, 이 비(碑)는 동승탑 앞쪽에 서 있는 비로, 비몸돌이 없어진 채 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다.

    받침돌은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엎드린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성이 떨어지며, 잘려진 것을 복구해 놓아 부자연스럽다. 용의 등에는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아 새로운 느낌이다.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머릿돌은 용무늬를 생략하고 구름무늬만을 새겼으며,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놓았다.

    작고 아담해진 규모와 통념을 벗어난 조각형태를 지닌 고려시대의 비로, 통일신라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인다.



    연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 1562∼1649)이 중창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1억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절에는 국보 제53호인 동 승탑 (), 국보 제54호인 북 승탑 (), 보물 제151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 보물 제153호인 동 승탑비 (),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탑 ()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동 승탑은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현재 대웅전 남쪽의 길옆에 있는데, 옛날 이 탑이 위치한 곳까지 건물이 있었다고 보면 그때의 절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에 하층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동조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소요대사탑의 문비()에는 ‘(소요대사지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절이 임진왜란 후 소요대사에 의하여 중건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연곡사 소요대사 탑


    보물 제154호. 높이 3.6m. 평면 팔각원당()의 기본형으로 8각의 지대석() 윗면에는 낮은 몰딩 (moulding)이 있어 하대석()을 받고 있다. 8각으로 된 하대석도 높은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나 상단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린 조각이 있다.

    윗면은 중앙에 몰딩이 있고, 그 주위로 홈이 패어 있다. 중대석은 편구형()인데 그 상·하에 단판연화()가 대칭으로 돋을새김된 특이한 양식이다. 상대석은 8각으로 단판 8엽의 앙련()이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형받침이 있으며 윗면에는 높은 호형()의 굄이 있다.

    탑신석()도 8각으로 1면에는 문비형()을 새겼고 다른 면에는 별개의 돌을 끼운 듯이 보일 정도로 아주 강한 돋을새김의 신장상()을 1구씩 배치하였는데 조각수법은 세련되지 못하다.

    옥개석() 역시 8각인데 추녀끝은 얇아졌으나 아주 넓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서까래가 모각되었고 윗면의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 면의 합각()에는 8줄의 우동( : 옥개석의 귀마루)이 뚜렷하며 추녀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는 완전한 편으로 정상면에는 8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가 있고 그 위에 편구형의 복발()이 있는데 횡대() 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이 승탑에는 탑신석 1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명문이 있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1649)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승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보물 제152호. 귀부 높이 112㎝, 이수 높이 75㎝.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979년(경종 4)에 건립되었다. 현재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조각 수법은 당대의 탑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나 비좌() 4면에 새긴 안상()과 귀꽃이 특색이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현각왕사비명)’이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지었고, 동정주국() 장신원()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형태미()를 나타내고 있다.





    연곡사 삼층석탑

    보물 제151호. 연곡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해 있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나 기단부가 2중이 아닌 3중 기단을 지니고 있다. 탑신부는 삼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하층 탱주가 1:1인 소형탑으로 9세기 후반 양식을 보여준다.

    역사적 변천

    연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의병의 본거지로 병화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탑은 일주문을 지나 법당이 위치한 석축 하단부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석탑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문헌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3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1967년 1월 해체수리 후 복원되었다. 이때 상층기단 자연판석 위에서 높이 23.5㎝ 가량의 동조여래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용

    석탑은 전형적인 이중기단 석탑양식에 하나의 기단을 추가하여 전체적으로 3중의 기단부를 지니고 있다.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석은 귀틀석과 판석을 이용한 8매로 구성되었다. 갑석은 총 6매로 상면에 각출된 괴임이 없다. 중층기단은 저석과 면석이 1돌로, 동서면에 2매씩, 남북면에 1매씩 ‘H’자형으로 결구되었다. 모서리에는 모두 우주가 있고 중앙에는 1주의 탱주를 새겼다. 갑석은 3매로 하면에는 부연이 없고 상단 중앙에 호각형의 2단 받침을 각출하여 상층면석을 받치고 있는데, 호형받침에 비해 각형받침은 매우 낮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남북면 좌우에 우주가 있는 면석을 놓고 동서면 중앙에 1주의 탱주를 지닌 면석을 넣은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갑석은 1매로 하단에 각형 부연이 있고 상단에는 각형 2단 받침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다. 갑석은 단부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주었고 모서리에 합각선이 뚜렷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씩 총 6매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은 모두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으며 문비 조각 등의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모두 하단에 4단의 층급받침을 주었으며 상단에는 낮게 1단의 각형받침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전각부의 모서리 좌우에 1개씩의 풍경공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고 현재 반구형의 부재가 올라가 있으나 원래 상륜 부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징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 하나의 기단이 추가된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대의 하강에 따라 신라석탑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기단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탑은 별도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높이거나 탑구를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탑과 같이 별도의 기단부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독특한 기단의 구성을 신라시대 조탑경()으로 쓰인 『무구정경()』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전체적인 크기나 가느다란 비례 감각에 있어 9세기 후반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별도의 기단을 추가하여 3중기단을 형성한 것은 소형화를 추구하는 신라하대 석탑의 경향을 엿볼 수 있으며 나아가 당시 조탑경과 탑의 외관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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