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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엄사
    사찰 풍경 2017. 3. 24. 00:36














































    천은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찰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있는 초입이라 언제나 만원이다. 들목에는 여관과 기념품가게들이 밀집하여 집단시설지구를 이루고 있지만, 일단 긴 계곡길을 따라 화엄사로 들어서면 경내의 장엄함이 초입의 분주함을 말끔히 씻어준다.

    1920년대의 화엄사지리산의 산세와 견주어도 위축됨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지금의 화엄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1)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나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 만인 인조 8년(1630) 벽암 각성( , 1575~1660)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숙종 28년(1702) 장륙전이 중건되자 선교 양종 대가람의 지위를 얻었다.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 가람은 4개의 공간으로 영역화되어 있다.

    화엄사 가람배치도

    첫번째는 일주문·금강문·천왕문·보제루까지 이어지는 직선형 진입 공간이다.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는데, 일직선 가람형태에서 느낄 수 없는, 절집으로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일주문은 화엄사 전체 규모로 볼 때 소박한 편이며, 금강문과의 사이에 화엄사 중창주 벽암스님의 부도비가 서 있다. 보제루는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집이다. 천왕문 쪽에서 보면 2층 누각이나, 건물을 돌아 대웅전 쪽에서 보면 단층집이다. 보제루 앞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고, 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산문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앞마당을 가운데 두고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 각황전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대웅전과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영역이다.

    앞마당에는 동서 오층석탑이 서 있는데, 석축 위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대웅전과 짝을 이룬 일금당 쌍탑 구조가 아닌 일금당 일탑 구조, 동오층석탑은 남향한 대웅전과 서탑은 동향한 각황전과 각기 짝을 이룬 구조가 아닌가 짐작된다.

    동오층석탑 쪽에서 각황전을 마주한 채 올려다보고 있는 적묵당 또한 맞배지붕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그러나 천은사의 보제루처럼 조용히 앉아 경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철책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화엄사에서 중심이 되는 법당은 대웅전2)이다. 보물 제299호로 지정될 만큼 고건축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건물인데도, 거대한 규모에 안정된 비례를 갖춘 뛰어난 각황전으로 인해 조금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신세이다.

    화엄사를 화엄의 근본 도량답게 만드는 각황전은 그 뜻만이 아니라 규모로 볼 때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고졸하면서 당당한 위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건물을 받들고 있는 석축은 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바른층쌓기를 한 장대석 위에 장방형의 돌들을 역시 바른층쌓기로 하고 두꺼운 판석을 덮은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며, 안정감 있다.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의 위풍 역시 각황전의 웅장함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원통전 앞 사자탑도 흥미로운 석조물이나, 쓰임새를 알 수가 없다. 노주()라고도 하고 감로탑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 의미로 전각 앞에 세운 탑인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세운 석조물인지 알 수 없다.

    원통전 창방 아래 토벽에 그려진 주악비천·산신·동자·나한상 같은 벽화는 채색과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원통전의 건물과 같은 시기인 조선 중기 때 그린 것이다.

    화엄사를 위풍당당하게 하는 또 하나의 영역은 각황전 뒤쪽, 경내 서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효대이다. 여기에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우수한 작품으로 쌍벽을 이루는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사사자삼층석탑 주변의 동백숲과 반송은 화엄사 경치 중에서도 손꼽히는 경치이다.

    반송과 동백나무 외에 화엄사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이다. 수령 3백 년쯤 되는 높이 15m의 나무로, 80년 전까지만 해도 두 그루가 있었는데, 절을 중수할 때 한 그루를 베어서 목재로 썼다고 한다. 그때 베어낸 나무로 만든 판자 한 장으로 적묵당의 안마루를 깔고도 남았다고 하니 대단히 큰 나무였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창과 칼의 자루 등 무기의 재료로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한 바 있는데,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절 근처에 많은 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올벚나무도 그 무렵에 심은 것 가운데 살아남은 한 그루일 것이다.

    화엄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을 의식한 듯 곳곳에 새로 조성한 석등이 눈에 띈다.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구층암에는 10세기 무렵의 삼층석탑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석탑이 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등과 배례석도 남아 있다. 매표소 입구와 매표소와 일주문 사이의 중간 산자락 언덕에 부도밭이 있다.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절대 위의 부처님인 법신불로 보고 노사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은 비로자나불의 분신으로 본다. 이러한 점은 세 부처가 각각 엄연히 구별된다는 법상종이라든지, 삼신불은 구별할 수 없고 대등하며 유파에 따라서 석가모니불을 절대 우위로 보고 다른 불을 석가의 분신불로 보는 천태종, 또는 비로자나불만을 절대적인 부처로 모시는 밀교 들과는 구별되는 종파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화엄사는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당이니 대적광전이나 대명광전이라 해야 옳다. 다른 사찰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불가의 법식의 엄정성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다. 천은사에서 861번 지방도로를 따라 구례 쪽으로 2.2㎞ 가면 호남정유 구례농협 광의주유소가 길 오른쪽에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2번 군도로를 따라 2.7㎞ 가면 다시 두 갈래로 길이 나뉘는데 왼쪽 길이 화엄사로 가는 길이다. 갈림길에서 화엄사까지는 약 2㎞이다. 구례에서는 하동으로 가는 19번 국도를 따라 읍내를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18번 국도를 따라 3.6㎞ 가면 역시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화엄사이다.

    화엄사 입구 관광단지에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화엄각을 비롯한 여관, 민박집 등과 음식점이 많이 있다. 구례에서 화엄사로 다니는 군내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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