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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 마애여래 입상사찰 풍경 2016. 10. 16. 23:14
월악산 국립공원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의 전설이 있는
덕주사에 있는 마애불 풍경입니다.
선업이 있으면 그 자체에 갖추어진 힘 때문에 좋은 업보를 받게 된다.
나라의 왕이 편들어 주는 힘이라 할지라도 업력에는 못 미친다.
(대승장엄론)
보시는 큰 부의 문이 되며
그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문수사리정률경)
계율과 선정과 지혜에 의해 해탈을 얻었고
해탈의 지혜에 의한 통찰력을 갖추었으며
진실과 자비와 관용 그리고 인욕으로 충만하여
그의 사랑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감싸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일러 전능한 부처라 부른다.
(본생경)
노여움과 인색함에서 떠난 사람
좋다 싫다를 모두 버린 사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숫타니파타)
권선 순례!
강원도 사찰부터 돌기로 계획을 세운 명성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부터 갔다.명성 스님이 오대산 월정사를 제일 먼저 택한 것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에 가서 참배부터 하고 싶어서였다.
평창에 도착한 명성 스님은 감개무량했다. 평창에서 중학교를 다녔으니 평창은 자신이 소녀 시절을 보낸 고장이다. 아버지인 관응 스님으로부터 세계 위인전을 선물 받아서 밤새워 읽었고, 상원사를 오르내리면서 한암 스님에게 사탕도 얻어먹고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라는 가르침도 받았다.
아득한 기억 속에 잠시 잠겼던 명성 스님은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하늘은 너무도 맑고 청청했다. 보궁에 오른 명성 스님은 부처님을 향해108배를 했다. 이번 권선 순례가 무장무애 속에서 끝날 수 있기를, 그래서 학인들이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도했다.
이렇게 시작한 권선 순례는 강원도, 경기도, 서울, 충청도, 경상도, 부산을 돌면서 끝마쳤다. 그동안 몇 번 운문사로 돌아와 공무를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명성 스님은 추운 겨울을 권선 순례로 보냈다.
그렇게 권선을 마치고 운문사로 돌아온 날 저녁, 명성 스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졌다. 이 사실을 누가 알까? 함께 살고 있는 시자스님은 알았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명성 스님은 자신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져나갈 만큼 힘들었음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다음 해인 1989년 6월, 청풍료 공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건물이 완성되자 사미니반, 사집반 학인들은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이사해 공부를 계속했다. 사미니반, 사집반은 청풍료에, 사교반은 금당에, 대교반은 설현당에서 공부했다. 이제 운문승가대학은 학인들이 공부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비구니 교육 기관으로 그 면모를 갖추었다.
남지심 평전소설 <명성> 중에서 - 불광출판사명예욕과 탐욕 그것은 아침 이슬과 같고
고통과 번민 영화와 출세 그것은 저녁 무렵의 연기와 같다.
(자경문)
부처님은 누구신가
/부처님이 병으로 고생하시다/
| 상윳따 니까야: 7 브라흐마나 상윳따 2:3 |
이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티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풍병으로 괴로워하셨다. 그때 우빠와나 존자가 부처님의 시자였다. 부처님은 우빠와나에게 말씀하셨다."우빠와나, 더운물을 좀 가져오너라."
그래서 우빠와나는 브라흐민 데와히따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한쪽 켠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비구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깨달으신 분, 복덕이 구족하신 성자께서 풍병으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브라흐민이여, 더운물을 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브라흐민은 사람을 시켜서 더운물과 물지게를 가져오게 하고, 한 자루의 당밀을 우빠와나에게 주었다. 우빠와나는 돌아와서 당밀을 더운물에 타서 부처님이 마시도록 하고 더운물로 목욕을 시켜 드렸다. 그 후 부처님의 병은 나았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건강할때 빨리 복덕을 지어야 하니
병이 들면 복덕을 닦으려 해도 몸과 힘이 허락하지 않네.
(대장엄론경)
재물과 색의 화는 독사보다 심하다.
(계초심학인문)
만약 물이 항상 있다면 우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만약 욕심이 전혀 없다면 무엇을 바라고무엇을 구하리.
(소부경전)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의 허물만 찾으러 다닌다.
(불설무희망경)
불자는 바로 나 자신이니 부처님의 입을 따라 태어났고
법의 교화를 따라 태어나 부처님 가르침의 한 부분을 얻는 것이니라
(잡아함경)
비록 사람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뒤에 삼가 다시 짓지 않으면
그는 이 세상을 비추리 구름을 벗어난 달과 같이
(법구경)
자기의 본성을 깨치라!
견성(見性)이란 곧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견성으로 신심이 두터워지는 것이 가장 가치가 높습니다.옛날 푸젠성 푸롱산에 계시던 영훈 선사가 어느 날 귀종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선사께 가르침을 청하건대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
"말해줄 수 없네, 말해줘봤자 믿지 않을 테니!"
영훈 선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어찌 안 믿겠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귀종 선사의 대답이 실로 엉뚱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주지, 바로 네가 부처야!"
영훈 선사는 이 말을 듣고 단박에 깨달았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제가 "여러분이 모두 부처입니다!" 하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내가 보기엔 아닌데…'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귀종 선사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 있으면 헛것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모든 상을 여의면 곧 모든 부처님을 보게 된다"고 말했듯이 우리가 자성(自性)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모두 자기가 부처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너와 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쁜 것, 괴롭고 즐거운 것 등의 분별로 따지니, 마치 색깔 있는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 것처럼 세상 본래의 모습을 잘못 알며 자기의 본성마저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황벽희운(黃檗希運,?~850) 선사가 당 선종(宣宗)의 출가 시절에 나눈 문답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승가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라
不著佛求 不著法求 不著衆求
신앙은 자신 밖에 있는 세상사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져 자기의 본성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는 우리의 자성 가운데에 본래 갖춰져 있는 것입니다.현실적으로 볼 때 불법승 삼보는 신앙의 과정에서 하나의 보조적인 인연으로 결국은 자기를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불성이 있다.'는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면 신심을 반드시 두텁게 할 수 있습니다.
성운대사 <보통중생 보통부처> 중에서 - 모과나무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숫타니파타)
부처님은 누구신가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 상윳따 니까야: 7 브라흐마나 상윳따 2:1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브라흐민 마을인 에까날라에서 가까운 마가다 사람들이 사는 곳인 닥키나기리에 계셨다. 그때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파종할 때가 되어 오백 개의 쟁기를 멍에에 실었다. 이때 부처님은 탁발하기 위해 까시 바라드와자가 마침 음식을 분배하고 있는 곳으로 가셨다.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을 보고 말하였다.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그대도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드십시오."
"브라흐민이여, 나 또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따마 존자님의 멍에나, 쟁기, 밭가는 연장, 소몰이 막대, 황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고따마 존자님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에 먹는다고 하십니다."
브라흐민 까시 바라드와자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대는그대는 밭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밭가는 것을 보지 못했네
그대가 밭가는 사람이라면, 말해 주시오
그대의 밭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에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믿음은 씨앗이며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나의 멍에와 쟁기이며,
마음은 멍에의 끈이며, 부끄러움은 막대기이며,
마음챙김은 보습과 소몰이 막대일세.
몸을 단속하고,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알맞게 먹습니다.진실은 나의 제초기이며, 온화함은 멍에를 벗음일세.
정진은 나의 짐을 진 소이며,
속박으로부터 안온함으로 이끈다네.
쉬임 없는 정진으로 슬픔 없는 곳에 이르네이렇게 밭갈이가 끝나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네.
일아 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중에서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주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개설
보물 제406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주사는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누이 덕주공주(德周公主)가 건립한 절이라고 하는데, 한국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마애불은 남쪽 화강암 벽면 가득히 부조되었는데, 얼굴과 어깨는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는 선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법의의 옷주름도 도식화되어 그 규모에 비하여 조형 수법은 졸렬한 편이다. 마애불의 양어깨 위에는 사각형의 건물 가구공(架構孔)들이 남아 있어, 조성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반원형의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으며, 비만한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과장되게 표현되어 예배상으로서의 숭고미는 찾아볼 수 없다.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얼굴이 상체에 맞붙어 버렸으며, 삼도(三道)는 가슴 위에 선각되어 있다. 비만한 신체 역시 인체의 조형적 특성이 무시된 채 괴체화(塊體化)되었다.
통견(通肩)의 법의는 힘없이 늘어져 원호를 그리고 있다. 옷주름 역시 힘이 빠져 생동감을 잃었다. U자형으로 늘어진 법의의 앞자락과 양 무릎 위에 표현된 동심타원형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의(佛衣) 형식이 도식화된 것이다. 왼쪽 팔목에 걸쳐 흘러내린 소맷자락도 무의미한 몇 가닥 음각선으로 주름져 있다.
지나치게 과장된 양손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맞대었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향하고 있어, 아미타불의 구품인(九品印)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법의 자락 밑으로는 평행하는 세로줄의 옷주름을 새긴 군의(裙衣)가 표현되었다. 좌우로 벌린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다. 발 좌우에는 발을 감싸듯 너비가 넓은 앙련(仰蓮 :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고려 초기의 거불 조성의 추세에 힘입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비만한 얼굴과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한 조형, 입체성이 거의 무시된 평면적인 신체 그리고 현저하게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조형 수법은 불상의 규모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제작 시기는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