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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던 자리 황룡사지 풍경입니다.
황룡사터는 경주시 구항동 분황사 앞뜰에 널리 펼쳐져 있다. 신라 최대의 절이자 호국의 대사찰로서 고신라 불교문화의 정수가 모두 모여 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창건역사를 보면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절로 고쳐 황룡사라고 하고 17년 만인 569년 완성했다. 이 때 솔거가 이 절의 벽에 노송을 그렸다. 명실 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이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태화지 옆을 지날 때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 또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자장은 귀국해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으며,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석탑을 건립하는 중에 백제건축가 아비지가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망하는 현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멈추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날이 어두워지더니 늙은 스님과 힘센 장사가 장육존상이 안치된 금당에서 나와 탑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이에 감동하여 자기를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 (삼국유사)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 만에 신라는 3국을 통일하였고 후에 수많은 현철들이 신라 삼국통일은 이 탑의 영험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3보배라 하는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구층탑 및 진평왕 옥대 중 2개가 황룡사에 있었으며 신라 최대의 종이 황룡사에 있었는 데 몽고의 침입으로 없어졌다. 황룡사에서는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 진평, 선덕, 헌강, 진성의 제왕이 친히 설법을 듣던 곳이다.
1969년 7월 이곳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구재의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8,800평해 달해 불국사의 8배나 된다. 현재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경주국립박물관의 황룡사 모형
황룡사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553년(진흥왕 14)에 새로운 대궐을 본궁 남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신라인들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 이 절을 가섭불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로 보았는데, 이는 신라인이 염원하는 불국토(佛國土)가 먼 곳이 아닌 신라 땅이라는 자각과 관련된 것이다. 황룡사지는 현재 발굴이 중단된 상태인데, 앞으로의 발굴기는 상황에 따라 발굴 계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한다. 유지(遺址)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중문(中門)·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은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밖에도 금당 뒤에 강당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있다. 삼국시대 가람배치의 정형인 일탑(一塔)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에서 이보(二寶)인 장륙존불(丈六尊佛)과 구층탑이 이 절에 있었고, 화성(畵聖)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에 있었다. 또한, 강당은 자장(慈藏)이 《보살계본 菩薩戒本》을 강설한 곳이고, 원효(元曉)가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연설한 곳으로,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던 7일 동안에는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려 강당을 덮었다고 한다.
또, 역대의 왕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강당에 친행(親幸)하여 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講)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었다.
이 절의 중심은 구층목탑이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이에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龍春)이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는데, 총 높이가 225척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00립(粒)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또한, 이 탑의 각 층은 아래에서부터 일본·중화(中華)·오월(吳越)·탁라(托羅)·응유(鷹遊)·말갈·단국(丹國)·여적(女狄)·예맥(濊貊)의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는 이들 나라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조성된 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에 벼락을 맞고 불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1238년(고종 25)에 몽고군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 중수되지 못하였다.
현재 목탑의 각 초석은 지름이 약 1m 내외로서, 사방에 8개씩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그 중앙에는 심초석(心礎石)이 있다. 그 심초석은 다른 육중한 돌로 덮여 있다. 1964년 12월에 도굴꾼이 이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함을 훔쳐갔으나, 그 뒤 도굴단의 적발과 함께 사리함을 회수하였다.
이 유물들을 통하여 탑에 얽힌 역사는 더욱 확실히 입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리함은 사면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네 귀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법당인 금당 안에는 장륙의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대제자상, 2구의 신장상(神將像)이 있었다. 이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륙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한다.
이 금과 철을 서울인 경주로 실어 와서 574년(진흥왕 35) 3월에 장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336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1238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금당터에 자연석 대좌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보다도 4배나 더 크고 17년 앞서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하지만, 이 종도 몽고군의 병화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터는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