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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 박물관내의 야외에 있는 석탑이 있는 풍경
균형과 조화의 미가 아름다운 석탑이 있는 풍경
뛰어난 조형미에 감탄사사 절로 나옵니다.
선조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아름다운 조각 솜씨가 돗보이는 아름다운 조형물
석탑의 미가 아름답습니다.
다보탑
국보 제20호.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즉 다보여래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하기 위해 보탑의 형상으로 솟아나 공중에 머물며 찬양한 후, 탑내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나란히 앉았다는 내용이다. 『불국사 사적기』에는 다보탑을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으로, 석가탑을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지칭한다.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시 2층 탑신 사리공에서 『무구정광대다리니경』과 함께 발견된 두루마리 묵서지편에 탑을 중수하면서 넣은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102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1038년) 등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 탑은 신라 혜공왕대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 15년(1024)과 정종 4년(1038)에 중수되었는데, 1024년 중수기를 다보탑의 중수기로 보고 있다. 이 탑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완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탑에서 불상을 포함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는 짧은 기록이 있으나 탑의 수리에 대한 내용이나 사리장엄구에 대한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다. 이후 1972년의 옥개석 위 돌난간의 일부 보수가 있었으며,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2월에 걸쳐 상륜부의 일부 해체수리와 일제 강점기에 사용된 시멘트 모르타르를 제거하고 균열부를 메우는 등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신라의 전형석탑과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형 석탑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탑의 층수에 대하여는 사각의 옥개석, 팔각의 옥개석을 사이에 두고 사각, 팔각난간을 별도의 층으로 해석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으로 2층설, 3층설, 4층설 등 다양하다. 기단은 방형 평면을 기본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어 전체적인 평면이 ‘亞’자 모양을 하고 있다. 계단에는 본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계단 윗부분 갑석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다.
탑신은 사각의 옥개석과 팔각의 옥개석을 중심으로 상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하단은 5개로 이루어진 석주로 구성하고 옥개석을 받는 석주의 상단은 끝부분을 호형으로 마치 목조건축의 첨차(檐遮)처럼 처리했다. 옥개석은 총 5매로 결구되었는데 중앙에 넓은 판석을 놓고 그 외곽에 엇물림식으로 4매를 돌려 놓았다. 그 위로 팔각 옥개석까지는 사각난간, 팔각난간, 연화문 앙련대의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은 장방형 대석을 깔고 외곽에 난간을 설치하여 소로(小累)형태의 난간대 모서리에는 뺄목까지 표현해 정교함을 더하였다. 난간 안쪽으로는 기대 모양의 8개 기둥을 세워 감실형을 나타내었다. 중단에는 팔각의 난간대를 설치하고 그 내부로는 8개의 대나무형 기둥을 세워 상대의 연화문 앙련대를 받치고 있다. 상단의 연화문은 총 16엽으로 앙련대 위에는 1석으로 만든 팔각대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위로 8개의 꽃술모양의 석주를 세워 위에 8각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팔각 옥개는 1석으로 옥개받침은 생략되었으며 처마 저면을 들여 다듬어 물끊기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전각부에는 풍경공이 합각선과 전각부 양쪽에 각 1개씩 총 3개가 남아 있다.
상륜은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노반은 옥개석과 같은 팔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발은 편구형이다. 복발은 네 방향에 꽃무늬를 조각하고 각 문양은 2조의 띠매듭으로 연결되었으며 상부에는 앙련을 새겼다. 앙화는 다시 팔각으로 얹었으며 그 위로 3개의 보륜과 정상에 보개를 덮고 최상단에 보주를 놓았다.
석가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은 경주 불국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이다.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따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보탑
이 탑은 신라시대 건립된 이후 불국사에 속해 있어 크게 파괴되거나 외형의 변화없이 전승되었다. 석가탑과 함께 한 사찰내에서 쌍탑으로 존재하면서도 전혀 다른 형태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따라서 양탑은 비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지대석의 너비와 기단과 탑신의 높이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어 대칭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편 다보탑은 기단부에 나타나는 사방의 계단, 곳곳에 보이는 사각과 팔간의 난간, 또 그 내부에 표현된 감실은 『법화경』에서 이야기하는 칠보탑(七寶塔)의 형태를 그대로 현실에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경전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현실공간의 건축으로 승화한 점은 이 탑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탑
이 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2]
높이 10.4m.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따 없어진 부분을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 이는 유례가 드물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해체 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사리장엄구 발견경위
1966년 가을, 도굴로 인해 석가탑이 일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굴사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피해를 입은 석가탑을 해체보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66년 10월 13일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4]
보수과정에서 2층 탑신석 상면 중앙 사리공 내에 봉안되어 있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41cm, 깊이 19cm로 구성되었으며, 사리공 중앙에는 금동제 사리 외함이 안치되었고, 주위에는 동경, 비천상, 구슬, 목제소탑 등의 공양물들이 납입되어 있었다.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은 동탑인 다보탑(多寶塔)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다.
그러나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는 1024년(현종 15)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정종 4)에 다시 옮겨 적은 것으로, 이 탑(혹은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지칭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불국사의 두 탑이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불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해서 석가탑 창건을 751년으로 보았으나, 묵서지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중수기 기록으로 다보탑과 석가탑 모두 대성각간(大城角干)의 주도하에 불국사 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 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는 10.4m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큰 돌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설치되어 있는데, 상하 기단은 각각 여러 개의 석재로 짜여 있다.
하층기단은 기대(基臺)에 높직한 굽이 돌려져 있고, 중석(中石)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 2주씩이 각 면에 모각(模刻)되어 있다. 갑석(甲石)은 4매로 되어 있으며, 윗면에는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활모양의 2단 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보다 높고 우주와 탱주가 2주씩 있다. 갑석에는 밑에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있고, 약간의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각형의 2단 탑신(塔身) 굄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층 탑신에는 4개의 우주가 있다. 각 층 옥개석은 조성수법과 형태가 같다. 옥개받침은 5단씩이고 위에는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평평하고 얇으며 4면의 합각(合閣)은 예리하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았으나 1973년에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의 상륜부를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연꽃을 조각한 탑구(塔區)가 있는데, 이것을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 한다. 이것은 탑의 정역(淨域)을 구별한 것으로, 연꽃 1송이에 1보살씩 8보살의 정좌라고도 하고, 또는 석탑에 직접 조각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팔방금강좌는 특별한 착상인 동시에 탑의 장엄을 한층 더하여 주는 희귀한 유구(遺構)로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한 훼손사건이 발생하여 손상됨에 따라 1966년 10월에 탑신부의 해체수리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 12월에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탑신의 상면 중앙에 있는 네모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莊嚴具) 및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서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현재 국보 제126호로 일괄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또한 이 탑에는 백제의 공인(工人)인 아사달과 그를 찾아온 부인 아사녀의 애화가 전해오고 있다.
석가탑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도 알맞고 극히 안정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목조탑파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 초기의 석탑에서 발전하여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정형(定型)을 확립하였다. 이후 건립되는 우리나라 석탑들은 대부분 이 석가탑을 모범으로 삼아 건립된다.
다보탑
[의의와 평가]
불국사 다보탑은 조형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통일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보탑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시킨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고선사지 3층 석탑
국보 제38호. 높이 9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래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지에 있던 탑인데 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해 1977년 경주박물관으로 이건했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가 워낙 커서 탑의 여러 부분을 각기 몇 개의 석재로 나누어 가공한 후 결합하는 건축방식이 사용되었다. 석재들이 서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I자 모양의 철제은장을 박아 고정했다. 동자주를 하층기단의 중석에는 5개, 상층기단에는 4개 조각했다.
초층옥신의 높이와 너비는 감은사서탑과 동일하지만 옥신의 각면에는 감은사서탑과 달리 문비 모양을 모각했다. 문비 모양의 내부 모서리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각면에 금동판 같은 것을 덧씌워 장식하기 위해 못을 박았던 구멍으로 추측된다. 문비 모양의 한 가운데에 새겨진 2개의 원형은 문고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의 축조연대는 원효(617~686)가 고선사에 주석했다는 사실과 함께 탑의 규모와 형식이 감은사서탑(682)과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7세기말경으로 추정된다.
목조탑을 석재로 표현한 거대한 크기의 초기 석탑의 하나로서 당당한 균형이 잡힌 모습은 감은사서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우수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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