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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경이 있는 경주
    여행스케치 2015. 6. 17. 22:56

    신라 천년 고도 경주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모습이다.

    어디를 가나 천년고도의  유적과 더불어 아름다운 풍경이 반겨준다.

    곳곳에 고분이 있고 거대한 고분의 곡선과 산능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고분과 더불어 고목으로 조성된 숲

    소나무가 유유자적하게 자란 소나무 숲은 또 얼마나 운치가 있는지.

    경주는 어디를 가나 운치있는 풍경의 연속이다.

     

    조화와 균형의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곡선이 아름다운 첨성대 풍경

     

    고분의 봉분의 선이 아름다운 고분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는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분의 풍경

     

     

     

     

     

     

     

    숲이 아름다운 계림

     

     

     

     

     

     

     

     

    숲속길이 아름다운 계림 숲속 길

     

    계림

    사적 제19호. 원래 시림이라 하여 신라초부터 있던 숲으로 경역은 약 7,300㎡이며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해 열어보니 속에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알지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條)에 보면, 왕은 계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이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의 계(鷄)를 '새'로 읽어 계림은 '새벌'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분과 소나무

     

    내물왕릉은 1963년 8월 27일에 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사적 제161호로 지정된 경주동부사적지대의 66만 9,293㎡에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사적 제19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는 경주계림의 경내에 있다. 이 왕릉은 경주계림의 미추왕릉지구 제30호분으로 지정돼 있으며 월성(月城)으로부터 서북쪽으로 220m 떨어져 있다.

    [내용]

    형태는 흙을 올려 만든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봉분 밑둘레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돌아가며 보이고 있어 둘레돌〔護石〕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밑지름 2.2m, 높이 5.3m이다.

    평지에 마련된 것으로 보아 내부는 나무로 만든 덧널 위에 냇돌을 올려쌓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정식으로 발굴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경주시내 돌무지덧널무덤의 묘역이 봉분과 둘레돌, 그리고 가장자리에 돌린 도랑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능을 내물왕릉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5세기 초부터 6세기 전반대까지 대체로 왕릉이 경주시내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거대한 규모로 축조된다는 점이다. 둘째,『삼국유사』왕력(王曆)편에 내물왕릉이 “점성대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과 더불어 각기 박씨·석씨·김씨계의 시조왕들이 묻혀 있는 오릉(五陵)에 내물왕릉도 부가되어 전승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능을 내물왕릉으로 보지 않고 사료상에 나오는 왕의 세계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제98호분인 황남대총(皇南大塚)의 남분(南墳)을 내물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유유자적 운치있게 자란 멋진 소나무 숲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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