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감은사지 감탄이 절로사찰 풍경 2015. 5. 17. 11:24
2015년 5월 16일 찾은 경주 대왕암 가는 길가의 감은사지 풍경입니다.
감은 사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지어 졌다는 설화가 있는 감은사지
거대한 두개의 탑이 멀리서도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 감은사지 풍경
역사의 현장 그곳을 처음 찾아보니
천년이상을 유구이 그 모습을 간직하여 온 선조의 얼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감동이 흐르는 감은사지 탑모습입니다.
감은 사지 금당 밑에까지 바닷물이 흘러 들어와서 죽어서 동해 호국용왕이 되었다는
문무대왕이 바다물을 타고 드나 들게 만들었다는 금당의 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감은 사지
책에서만 본 감은사지를 직접 찾아보니 감동의 물결이 몰려옵니다.
감은사지 불탑 조화와 균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탑 모습.안정된 탑모습.
조화와 균형의 안정적이 자태가 천년이상을 변함없이 지탱하여 올 수 있는
동기가 된 아름다운 탑이다.
감은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개설
사적 제31호.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터이다. 1959년 1차 발굴조사에서 쌍탑식 가람배치로 밝혀졌고, 1979년과 1980년의 2차 발굴조사에서 초창(初創) 이후 2번에 걸쳐 중건(重建)되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지정(至正) 11년(1351) 명문(銘文)이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2구, 기와류∙벽돌류∙토기류∙자기류 등이 4,268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1961년 서탑 해체∙보수 당시, 제3층 탑신 내부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舍利器), 사리병(舍利甁) 등이 출토되어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서탑에서 발견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천왕상이 그려진 외함과 내함, 사리기, 사리병 등을 갖춘 사리장엄구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내용
경주 감은사지는 남쪽에서부터 중문(中門), 쌍탑(雙塔), 금당(金堂), 강당(講堂) 순으로 배열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雙塔式伽藍)이다. 남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이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문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架構式)의 기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면의 각 칸마다 2짝 출입문을 달았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의 전후면에 모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은 정연하게 쌓아올린 2중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의 사방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기단은 턱이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면석(面石)을 세우고 그 위에 부연이 있는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이다. 금당 아래에서는 특이하게 지하공간을 이룬 석조 유구(石造遺構)가 조사되었다. 윗면에 남북으로 홈을 둔 사각형의 돌을 정면 6열, 측면 4열로 놓고 이 홈들에 장대석을 끼워 연결하고, 그 위에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들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공간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 부합된다.
금당 북쪽의 강당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수직으로 쌓은 가구식의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으나 후대에는 서쪽 3칸이 축소되어 정면 5칸, 측면 4칸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강당 좌우에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으나 후대에는 회랑형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회랑 중에서,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남단에서 12번째 칸에 7칸의 익랑이 금당 좌우로 연결된다. 이 회랑들도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 기단으로 꾸며졌다.
금당 앞 좌우에 남아 있는 석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석탑들은 2중기단 밖으로 탑구(塔區)가 돌려져 있는 3중기단의 형식의 삼층석탑이다. 각 부의 구성이 백제의 석탑처럼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을 5단의 층급으로 표현한 것 등이 목조가구를 모방한 흔적으로 판단된다. 건립연대가 확실하여 현존하는 한국 석탑,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곳곳의 석재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색적이다.
특징
중심영역이 정방형으로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잇는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감은사지 동 서 3층 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개설
2기(基). 목탑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석탑 양식의 시원을 마련한 탑이다. 감은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682년(신문왕 2)에 건립되었는데,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 아들 신문왕이 완성하였다. 1962년에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높이는 각 13.4m이고, 동서의 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양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로 되어 있으며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에 세워진 평면방형(平面方形)의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이 같은 돌로 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隅柱: 모서리기둥)가 있는 외에 탱주(撑柱)가 3주(柱)씩 있다. 갑석(甲石)도 역시 12장의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굄이 있다.
상층기단은 면석이 12장의 석재로 조립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있는 외에 탱주가 2주씩 있다. 갑석 중앙에는 각형의 2단굄이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층기단의 아래쪽 주위에는 일정한 너비의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탑을 돌 수 있도록 하였다.
탑신부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 부마다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부는 적심석(積心石: 표면석의 내부에 채워 다지는 돌)으로 메워져 있으나, 제3층 탑신만은 석재가 하나인데 이것은 규격이 작은 원인도 있겠으나 사리장치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탑신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따로 만들어 맞추어 세웠으며, 제2층 탑신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장으로 조립되어 있고, 1장으로 조성된 제3층 탑신에는 각 면 양쪽의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낙수면 부분과 받침 부분을 별개의 돌로 조성하되 각각 4장으로 짜여져 있다. 받침은 각 층 5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다.
상륜부는 제3층 옥개석 위에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露盤石)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쇠로 된 찰주(擦柱: 탑의 중심기둥)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을 뿐이다.
노반 이상에 보이는 찰주의 높이가 3.5m, 그 이하로 제3층 옥개석의 중심에 꽂힌 부분이 약 1.3m이다. 이 찰주의 중간 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상륜부는 모두 석재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징
이 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각 부의 구성이 백제시대의 초기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는 점인데, 이것은 목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목조건축에 있어서의 구조성(構造性)을 잃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단을 2단으로 한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이후 석탑의 시원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서의 두 탑 중 서탑은 1959년 12월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해체 당시 제3층 탑신의 상면 사리공(舍利孔 : 사리를 장치하기 위하여 탑재에 파 놓은 구멍)에서 사리장엄구가 창건 당시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장경(長徑)을 남북에 두고 중앙보다는 좀 남쪽으로 기울어져 파여 있다. 사리공의 크기는 57×29.5㎝, 깊이 29.1㎝이며, 평평한 바닥 북단 가까이에 직경 15㎝, 깊이 9.3㎝의 원형배수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이 사리공 속에는 사각형 금동사리외함, 집모양 금동사리내함, 그리고 유리로 된 사리병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관계유물은 조성연대가 뚜렷하고 발견장소도 확실하여 보물 제366호(감은사지서삼층석탑내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후 1996년에 진행된 동탑의 해체수리 때에도 3층 탑신에서 서탑과 비슷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2002년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었다. 동탑 사리장엄구는 서탑과 마찬가지로 외함의 네 벽면에 사천왕이 표현되어 있으며, 내함에는 서탑과 달리 대나무 마디 모양으로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다. 천개에 드리운 장식 끝에 누금기법으로 만든 무게 0.04g의 초소형 풍탁이 달려 있어 당시의 놀라운 금속세공기술을 엿볼 수 있다.
2006년 서탑은 다시 보수작업에 들어가 표면 오염물질 제거 등의 보존처리와 부재강화 처리, 3층 옥개석 해체 수리 등의 과정을 거쳐 2008년 복원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상하 2단의 기단과 탑신부의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고 전각에서 추녀가 위로 들려지는 등 목조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추녀 밑 부분과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 등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석탑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되었다
'사찰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상사 풍경(칠암자중 일곱번째) (0) 2015.05.27 부처님 오신 날의 실상사 풍경 (0) 2015.05.26 봄이온 통도사 암자 풍경 (0) 2015.04.23 팔공산 부도암 (0) 2014.11.30 팔공산 동화사 (0) 2014.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