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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의 가을 풍경사찰 풍경 2014. 10. 17. 23:23
설악산 내설악의 깊은 계곡에서 부터 백번째 담이 있는 곳에 세워진 절이라고 해서 붙여진 백담사의 가을 풍경입니다.
내설악의 백담사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봉정암오르는 길목이기도 한곳 백담사의 가을 풍경이 오색 단풍으로 인하여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깨어있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가없는 마음)입니다.
즉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暝想)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납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밝혀야 합니다.
[법정스님 어록]
모든 중생의 마음 성품이
본래 깨끗함을 아는 것을 사랑(慈)이라 하고,
온갖 것은 평등하기가
허공 같다고 보는 것을 슬픔(悲)이라 하며,
온갖 기쁨을 끊는 것을
기쁜 마음(喜)이라 하고,
온갖 행을 멀리함을
버린 마음(捨)이라 하며,
모든 법은 미래 세상에는 깨끗하고
과거에는 갖가지며,
현재에는 '나'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이러한 법을 진실로 관찰하여 분명히 안다면
이것을 보리심(菩提心)을 뚫는 것이라 하나니,
보살이 이 모든 법을 관찰하고 나서는
차례로 온갖 법 자재(自在)로운 다라니를 얻느니라.
[대방등대집경]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희망을 심어 주었던 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은혜와 기쁨 베풀게 하시고
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은밀히 짊어지게 하소서.
여덟 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
모든 것이 때 묻지 않게 하시고,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
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달라이라마 어록]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如意寶珠)보다 귀한
생명가진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내가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게 하소서.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대자비(大慈悲)를 갖는 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단순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대자비는
이기주의나 편협한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계속 깨우친다......
시기심과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욕망을 던져버려라.
대신 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라.
친절한 마음과 용기, 자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환영하라.....
솔직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뿐 아니라
오른손도 모르게 할 때, 그때야말로
그 선함이 우리의 몸과 영혼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 어록]
무(無)도 죽고, 침묵도 죽고,
무한자(無限者)마저도 죽지만
참으로 님[佛性]을 사랑하는 이는 죽는 걸 모른다.
그대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무(無)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공(空)과 무(無)를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떨어져 있는 존재다.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아직까지 공(空)은 자각과 지각의 '대상'이다.
자신이 무(無)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놈은 누구인가 ?
이러한 경지를 체험한 놈은 누구인가 ?
'나'가 '아는 자'가 아직도 떨어져 있다.
아직도 이중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중성이 있는 한, 죽을 수밖에 없다.
오직 사랑[慈悲]만이 죽지 않는다.
사랑 안에서는 먼저 '사랑하는 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진실한 사랑이 우러나온다.
자신도 신[佛性]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이 존재하는 순간에
참된 사랑[慈悲]은 태어난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중생의 마음은 본디 부처이기 때문에
항상 잊지 않고 부처를 생각하면
금생과 내생에 반드시 부처를 볼 수 있으리.
若衆生心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 [능엄경]
.........................................................
마음이란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여,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고 아무런 자취도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다만 허무하게 비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상은 무한한 능력을 원만히 갖춘 생명의 광명으로써,
바로 불성(佛性), 곧 부처님인 것입니다.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 만유(萬有)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 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청화스님 어록]
깨어있는 마음과 가없는 마음만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불을 완전히 꺼
괴로움 한 가운데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한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한다.
가르침의 도리를 잘 이해한 사람이 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이 이것이니, 방편의 가르침에 유능하고,
진리에 의지하여 솔직하고 몸과 마음이 청정할 것, 좋은
말을 하고 유화하고 거만하지 않을 것, 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欲)할 것, 잡스런 일에 매이지 않고 간소하게
살아갈 것, 오근이 청정하여 총명 겸허할 것, 더러운
짓을 하여 식자의 비난을 사지 말라. 서로 남을 속이지
말며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경멸하는 생각을 지니지 말라.
분하다든지 또는 밉다 하여 남이 고통에 빠질 것을 원하
지 말라.
오직 이런 자비심을 닦을지니,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와 은혜 있으라고.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지키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 또는 사람에게 끝없는 자비심을 베풀어라.
[잡아함경]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인 참모습(實相실상)에 대한 성철스님의
간결하고도 명확한 말씀으로 머리글을 대신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有形, 무형無形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니 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같이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이 삿(邪)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마음이 음탕하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으며,
생각이 약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생각이 부귀해지려 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또 네 가지 일이 있나니,
마음에 항상 죽는 것을 근심함이요,
마음에서 나쁜 짓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요. 반드시 마음을 살핌이요,
마음이 사람을 따르게 하되
사람이 마음을 따르게 하지 말라.
마음은 사람을 그릇되게 만들며, 마음은 몸을 죽이며,
마음이 아라한도 되고, 마음이 하늘도 되고,
마음이 사람도 되며,
마음이 축생, 벌레, 개미, 새, 짐승도 되고,
마음이 지옥도 되고, 마음이 아귀도 되나니,
모양이 있는 것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가 지금 부처가 되어 하늘에서나 인간에게서
공경을 받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불반니원경]
대저 부처라 법이라 천당이라 극락이라
지옥이라 축생이라 아귀라 하는 것을
어찌 다른 곳에 나아가서 찾기를 구하리오.
사람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내 마음에 모두 있는 것이니
이 마음밖에 또 다시 구할 것이 없기에
부처와 부처님이 이 마음을 깨달아 아시고
중생에게 보이시건만,
중생은 이 마음을 잘 알지 못하여
중생수(衆生壽)에 있어서 닦기를 힘쓰지 않는 고로
혹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하늘과 인간 사람과
수라에 돌아다녀 가고오고 하나니,
이 마음을 잘 닦으면
부처된다고 가르치신 것이 법이니라.
불법(佛法)은 공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다만 '깨어있는 마음智慧과 가없는 마음慈悲‘으로 매순간
行住坐臥語黙動靜 마음을 지켜봄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활안스님 어록]
.....................................
불교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는 명상瞑想에 달려 있으며, 제대로 명상을 하기 위해
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담긴 지혜(般若空)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법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 하나를 놓자 다른 하나를 잡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앞생각과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 없다.
마음이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로 빠른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항복 받아서
착한 길로 나아가도록 공부해야 한다.
[중일아함경]
...................................................................
마음은 아주 쉽게 탐닉합니다.
반대로 마음은 또 아주 쉽게 거부합니다.
마음은 아주 쉽게 극단으로 움직입니다.
마음이 중도(中道)에 머무는 것,
바로 중도에 있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에 있어 그것은 자살이기 때문입니다.
중도에서 마음은 죽고
무심(無心,순수 의지, 깨어있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그의 길을 '중도(中道)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을 정확히 알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탐욕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부는 오직 탐욕이 무엇인지 모를 때나 필요합니다.
광적인 탐닉은 습관의 반복을 낳고, 거부는 더 강력한
탐닉을 낳습니다.
만일 그대가 욕심이 많다면
깨어있음으로 그 욕심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대가 화가 났다면
깨어있음으로 그 분노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대가 어디에 있든
깨어있음으로 그 속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깨어있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통과해 가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대가 두려움 없이 눈을 뜬 채로
탐욕, 욕정, 분노, 질투를 통과해 갈 수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이를테면 바깥의 것을 쟁취하겠다는 소유의 욕망을 내
마음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어,
이웃이나 심지어 무정중생無情衆生들에게까지 나누어
주려는 마음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그것이 곧 대승大乘
입니다.
존재의 욕망은 자비慈悲를 나누려는 마음입니다.
[원효의 대승철학]
모든 중생(衆生)의 세계는 모두가 삼세(三世) 안에 있고
삼세의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 중에 있으니
모든 온(蘊)은 업(業)이 근본이요,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꼭두각시와 같으며 세간(世間)도 그러합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과는 서로 차별이 없으며
서로 다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모든 세간을 짓는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성품을 알게 되며,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보아야 합니다.
[화엄경]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을 바꾸라는 것
입니다. 즉, 탐욕적 소유론의 욕망에서부터 희망과 원력
願力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마음의 혁명을 이룰 것을 요구
합니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내 앞에 놓여 있는 의식의 실재적 대상
이 아니라, 마음의 욕망이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사이버
cyber 시공時空의 코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대상이 아니고 중생들이 제각각 그리고 있는 상상의
차원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복락의 시공으로 바꾸고 싶으면
세상을 복락의 욕심으로 지배하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을
보는 마음을 소유所有에서 존재存在로 전환해야 합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방법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사상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바,
이런 마음의 전환을 존재론적 혁명이라 부릅니다.
무욕無欲은 소유론적 욕망을 존재론적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지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가 욕계欲界에 있는 한 그런 일은 불가능한 요
구입니다. 무욕은 소유론적 무의식적 욕망을 존재론적 무의
식적 욕망으로 방향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여래를
본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너, 지구와 우주가 서로 의존하면서 무아(無我) 로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의 도리가 펼쳐지는 자리
는 모든 존재가 무(無)로 비워지는 자리입니다.
연기세계의 참 모습은 나다/너다, 있다/없다, 좋다/싫다 같은 상대
적인 세계와 모든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떠나 있기에 중도(中道) 라고도 합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중도연기中道緣起'입니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 연기법이라는 사실에 명확히 눈 뜨게 되면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천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연기적 깨침이란,
'나'와 '남'을 가르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
"나는 자아(自我)가 없음을 발견했다!"
내 존재의 핵심에 있던,
자아처럼 보이는 고정된 실재(實在)를 투과하면서
나는 자아가 없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파멸시키지는 않았다.
오직 나의 고통(苦痛)만을 파괴했다.
나는 해방(解放)을 완성했다.
그러나 너희는 내가 한 말을 믿을 필요는 없다.
너희 스스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아야만
무아에 이를 수 있다.
너희 스스로 진리를 찾아라.
너희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아를 온 힘을 다해
찾고 증명하고 설명하라.
그리고 자아를 찾았다면 내가 틀렸다고 말하라.
나의 말들은 무시하라.
자아의 핵(核)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것마다 녹아버려도 포기하지 말고 점점 더 깊이 찾아들어 가라.
마지막에 도달한 순수의식(無心)의 정점에서도,
내가 그랬듯, 극소로 영속하는 핵으로 된 자아를
못 찾는다 해도 두려워 마라.
그 공(空)을 대면하라.
그것이 궁극에 이르는 발판임을 잊지 마라 !
순수의식으로 된 자아를 집중해서 보라.
그러면 자아가 너를 놓아 주리라.
그때 비로소 너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서로 긴밀히 연결된 무한한 망(網)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난 후 너희는 상대적인 자아(空의 實顯)로서 행복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다른 존재들이 스스로의 복된 자유와 행복을 찾도록
도와줄 정도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有)'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無)'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차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도中道로 법法을 설명한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형성行이 생겨나고
형성形成을 조건으로 의식識이 생겨나고,
의식意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생겨나고,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감역六入이 생겨나고,
감역感域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생겨나고,
접촉接觸을 조건으로 감수受가 생겨나고,
감수感受를 조건으로 갈애渴愛가 생겨나고,
갈애渴愛를 조건으로 취착取著이 생겨나고,
취착取著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생겨나고,
존재存在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노사老死와 같은
모든 괴로움의 요소가 생겨난다.
깟차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발생發生'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무無는 없어진다.
깟차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소멸消滅'을 관찰하면 세상에서의 유有도 없어진다.
무명無明이 남김없이 사라져 없어지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고,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괴로움, 우울,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五蘊]들이 소멸한다.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라고 한다.
.............................................................
길[道]의 시작으로의 올바른 견해[正見]를
진리에 따르는 올바른 견해라 부르며,
길[道]의 종극으로서의 올바른 견해[正見]을
진리를 관통하는 올바른 견해라 부릅니다.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의 진리에 대한 초보적 이해가
그 진리에 대한 관통으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윤리적 실천[戒:正語/正業/正命]과
정신적인 집중[定:正精進/正念/正定],
그리고 지혜의 개발[慧:正見/正思惟]이 필요합니다.
세속적인 올바른 견해는
행위의 주체를 자신으로 하는 올바른 견해로써 시작합니다.
[무지한 자에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생겨난다면,
그가 만든 그러한 업(業)은 크거나 작거나
무릇 자신이 받아야 하며 남이 받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업(業)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相續者)이며,
업을 모태(母胎)로 삼는 자들이며,
업을 친지(親知)로 하는 자들이며,
업을 의지처(依持處)로 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
업(業)과 업보(業報)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윤회의 한계 안에서 선한 행위를 추구하고
보다 높은 존재 상태를 얻는 데 합리성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서 해탈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성적 윤회의 전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해탈은
모든 형태의 윤회를 구성하는
연생(緣生)의 특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의존합니다.
성스런 올바른 견해는 이러한 해탈로 이끄는 것인데,
사성제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발생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통찰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통찰하는 것,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부른다.
온갖 겉모양은 모두가 허망하니
모양이 모양 아닌 줄 알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금강경]
.......................................................................
사람들은 공空을 뜻하는 슈나타shunyata를 크게 오해합니다.
공이라고 하면 '허무'라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었다'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부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하는 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충만함'보다도 더 긍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空의 경지에서야말로 완전한 자유自由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 냈기 때문에 걸림이 없습니다.
모든 경계境界가 사라졌습니다. 공속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공空은
보이는 것의 부재不在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의 현존現存입니다.
[오쇼 라즈니쉬 강의록]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이것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初善中善後善)
좋은 뜻과 좋은 의미로서 순수하고 하나같다.
원만하고 깨끗하여 범행이 청정한 것이다.
그래서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고 한다.
제일의 空이란 무엇인가?
눈(眼)은 생길 때에도 온 곳이 없고, 멸할 때에도 간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면서 생기고, 생겼다가는
다 소멸하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지은 자가 없느니라.
이 쌓임이 소멸 하고 나면 다른 쌓임이 이어 받나니 세속의
범주와는 다르다. 귀, 코, 혀, 몸, 뜻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세속의 범주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위가 있고, 행위를 인연하여 의식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위가 없고, 행위가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도 소멸한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第一義空經이라 한다.
[잡아함경]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실제의 문[實相]을 열 수 있는 열쇠로 제시하셨습니다.
'무상'은 시간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고,
'무아'는 공간의 관점에서 하는 말입니다.
'무상'을 깊게 살펴보면,
사물은 원인과 조건이 변함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아'를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물은 무상하고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물은 생과 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철저하게 접해보아야만
생사, 영원과 무상 그리고 자아와 무아를
벗어난 존재의 근거를 접할 수 있습니다.
바다를 보면
각각의 파도에는 시작과 끝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의 파도는 높고 낮음, 시작과 끝, 그리고 미추(美醜)라는 표시를 통해 다른 것과 구분됩니다.
그러나 바다의 세계에는 표시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상대적인 진리의 세계에 있는 파도는 솟아오를 때는 행복을 느끼고 부셔져 내릴 때는 슬픔을 느낍니다.
파도는 "나는 높은 파도다"
또는 "나는 낮은 파도다."라고 생각하고는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파도가 자신의 참된 본성,
즉 자기가 곧 바다라는 것을 알면,
모든 강박관념을 멈추게 될 것이고
파도는 생사를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탁닛한 스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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