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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산서원 풍경
    여행스케치 2014. 5. 10. 23:34

    안동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유교문화 체험길을 따라 옛선비들이 걸어간 선비길을 따라 1시간 이상을 걸어서 낙동강변 병산이 보이는 병산서원에 도착

    유교 문화의 고향 예선비들이 공부하던 고풍스런 병산서원 고색찬연한 풍경입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건물로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신문(神門)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장판각(藏板閣)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장판각

     

     

     

     

     

     

     

     

     

     

     

     

     

     

     

     

     

     

     

     

     

    병산서원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前身)이다. 선조 5년(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1607년 서애선생이 타계하자 광해군 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광해군12년(1620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인조9년(162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병산서원 사진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건물로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입교당의 석축과 아궁이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에 있는 것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기 힘들다.
    장판각(藏板閣)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신문(神門)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정료대(庭燎臺)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로서, 마당 좌우에 1쌍이 있는데,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부분) 가지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혔다. 팔각형의 기둥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의미하고 있다.
    관세대(관洗臺)
    제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병풍을 펼친듯한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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