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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문화 유산 경주 양동 마을 봄 풍경
    여행스케치 2014. 4. 23. 22:56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

    내용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이 마을은 조선시대 초기에 입향(入鄕)한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살아온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양대문벌을 이루어 그들의 동족집단마을로 계승하여 왔다.

    먼저 입향한 손씨는 이씨의 외가로서, 손·이 양씨는 지금까지도 상호통혼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에 협동해오고 있는데, 이따금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은 경주시내에서 동북방으로 16㎞쯤 떨어져 있으며 넓은 평야에 임한 거꾸로 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지형이다. 이 역수 지형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 믿어지고 있다.

    마을의 서편에는 실제로 부의 상징인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대부분의 지주가 과거에는 손·이 양씨였으므로 ‘역수의 부’는 관념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 쪽의 고깃배들이 일상 내왕하였기 때문에 해산물의 공급이 불편 없이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도 줄고 바닥도 높아져서 어선의 내왕이 불가능하다.

    마을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 의하면 양동은 역대로 ‘외손이 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즉, 고려시대에는 오태사(吳太師)에서 장태사(蔣太師)로, 조선시대에는 유복하(柳復河)에서 손소(孫昭)로, 다시 이번(李蕃)으로 계속해서 외손 쪽으로 계승되어 왔다고 한다.

    일설에는 신라시대에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5, 6호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였고, 그 때부터 양좌촌(良佐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근거가 분명한 입향조는 손소인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손소는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함경도 길주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다.

    뒤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장인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마을에 들어와 지금의 월성 손씨 종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한편, 손소의 딸은 여강 이씨 번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맏이가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고 있는 이언적(李彦迪)이다. 그는 외가인 손씨 대종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에게 훈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언적은 양산·김해·상주 등 외삼촌의 임지로 따라다니면서 수학을 하였으며 24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우재(愚齋)의 학문이 회재(晦齋)에게 전수되었다.”고 하는 손씨 측의 주장과 아니라고 부정하는 이씨 측의 상반된 주장이 두 가문 사이에 있어 온 갈등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마을내의 몇 개의 정자나 일반 살림집의 배치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 마을의 집들은 ㅁ자형이 기본형으로, 거꾸로 勿자형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이나 중허리에 배열되어 있다. 그 배치가 듬성하고 능선마다 우거진 숲이 있어 접근해야만 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1979년의 보고서에는 대종가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그 아래로는 직계 또는 방계손들의 집자리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을의 가옥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가옥은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16세기 창건)과 보물 제442호인 관가정(16세기 창건), 보물 제412호인 향단(16세기 창건)이 있다.

    중요민속자료로는 월성손동만씨가옥(15세기 창건, 제23호), 양동낙선당 (1540년경 창건, 제73호), 양동이원봉가옥(1840년경 창건, 제74호), 양동 이원용가옥(1730년경 창건, 제75호), 양동이동기가옥(1780년경 창건, 제76호), 양동이희태가옥(1730년경 창건, 제77호), 양동수졸당(1616년경 창건, 제78호), 양동이향정(1695년 창건, 제79호), 양동수운정(1582년 창건, 제80호), 양동심수정 (1560년경 창건, 제81호), 양동안락정(1780년 창건, 제82호), 양동강학당(1870년경 창건, 제83호) 등이 지정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200여 년 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들이 약 15채 가량 있다. 이 집들은 대부분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건축규모는 대략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대지 안에 사당을 모신 대종가와 파종가는 4가구이다. 이들 대규모 주택들에는 원래 한 집안에 데리고 있는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인 ‘가랍집’을 3, 4채씩 거느리고 있었다.

    광복 때까지만 하여도 가랍집이 4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텃밭으로 변하였고, 이따금 잔존하는 초가는 이미 거주자가 바뀌었으므로 과거의 상대적 신분관계는 해소된 셈이다. 이 마을 각 종손·파손들의 정자는 여름 동안 일곱 번의 놀이를 행하여온 특색이 있다.

    정자는 5월 그믐에 개장되고 보신탕 등 음식과 시창으로 양로·위안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절후로 보면 유두·초복·중복·말복·칠석·입추·처서 등이다. 지금 친족간의 협동과 유대는 주민들의 빈번한 도시 진출 때문에 점차 감소되는 상황이다.

    상조계는 손·이 타성바지 등 문중이나 파손별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협동의 비중은 상례·혼례·제례·회갑·생신·돌·백일 등의 순으로 나타내고 있다. 손·이 양씨의 계조직은 인근 경주·포항·대구 뿐 아니라 부산·서울 등 전국적으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동족간의 단합을 유지하고 있다.

    1819년 ≪양좌동초안 良佐洞草案≫에 기록된 양동의 호수는 91호였으나 1973년에는 165호, 1979년에는 151호로 증가와 완만한 감소를 보여왔다.

    손·이 양씨의 호구관계는 1973년에는 손씨 28호, 이씨 88호, 1979년에는 손씨 16호, 이씨 80호로 이씨들의 호수가 많다. 그러나 인근의 강동면과 경주시 전체를 본다면 손씨 후손들이 더 많다고 한다. 현재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孫東滿)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인식은 이언적의 15대손이다.

    이 마을은 아직도 유색(儒色)이 짙은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과거 마을 전승으로서도 동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세시행사로도 삼복 후의 머슴놀이인 호미씻이와 2, 3년에 한번씩 행하여지던 정월보름, 추석 전후의 줄다리기 등이 고작이었던 것도 하나의 특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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