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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한걸음 걸어서 오다/법정스님좋은글과 시 2013. 6. 13. 12:12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다 / 법정스님
온 천지가 꽃과 잎입니다.
겨울동안 아무 표정도 없이 묵묵히 있던 나무들이
활짝 잎을 펼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들은 봄이 오면 안으로 챙겨
넣었던 생명력을 마음껏 뿜어냅니다.
보세요. 나무마다 다른 빛깔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무는 봄을 맞으면 그 나무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빛을 뿜어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어우러져 살다보니
특성을 잃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갑니다.
4월, 눈부시게 펼쳐진 신록 앞에서 사람도 꽃과
나무처럼 철따라 새롭게 맑고 투명한 삶을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제가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내려주세요.” 그래서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니라.”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주는 일,
즉 너그러움과 관용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여러 가지 미덕
중에 가장 으뜸가는 미덕입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꾸짖는다면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
지적받고 질책 받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미리 가려야 할 것은
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입니다.
꾸짖음은 선의의 충고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꾸짖고 험담해서는 안됩니다.
선의의 충고는 사람을 정화시킵니다.
용서는 마음속에 사랑과 이해의 통로를 넓혀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나 가정에서는
지금 용서의 미덕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으뜸 미덕’은 잘못 감싸주는 용서., ‘
맺힌 마음’ 풀어놓으면 그것이 이기는 길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결점만 들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닌 미덕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미덕을 놓치게 됩니다.
봄날 꽃과 잎이 눈부시게 피어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훈훈한 봄기운 덕입니다.
가을날 잎이 지고 만물이 시드는 것은 차디찬
서리바람 때문입니다.
결점을 자꾸 들추는 사람의 시선에는
따뜻한 온기가 없습니다.
옛날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중국 초(楚)나라 장왕이 어느 날 잔치를 벌였습니다.
군신(君臣)간에 모두 취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촛불이
껴져 암흑세계가 됩니다.
이 때 한 신하가 장왕의
애첩에게 몰래 입을 맞췄습니다.
애첩은 깜짝 놀라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끊고 고합니다.
“등불을 켜게 하시고 갓끈이 없는 자를 벌하소서.”
이 때 지혜로운 왕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갓 끈을 떼지
않는 사람은 벌을 내리겠노라.”
그래서 모두 갓 끈을 떼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신하를 용서한 겁니다.
그 후 초나라는 진나라와 싸우게 됩니다.
초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 장수가 나타나서 죽음을 무릅쓰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칩니다.
알고 보니 그가 왕이 용서해 주었던 신하였습니다.
그날 왕이 내린 관용에 감동한 신하는
목숨을 바쳐서 왕을 지킨 겁니다.
관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 때 왕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면 초나라의 운명도 위태로웠을 겁니다.
요즘 대통령들은 이런 그릇이 못 됩니다.
미국 부시대통령도 이런 그릇이 못됩니다.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
침공하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정의로운 일도 아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업을 짓게 되면 스스로 그 과보를 받게 됩니다.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건 안했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가 했던 허물과 게으름만을 보라.” 여러분,
꼭 기억해두고 실천하십시오.
남의 허물이 눈에 띌 때는 그 시선을 돌려서
자기 자신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는 그런 허물과 결점이 없는가”라고 말입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네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싶거든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물어라.
그리고 누구의 허물도 들추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밖으로 한눈 팔 일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한눈을 팔게 되는 겁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말처럼 일단
지나간 일은 다시 들추지 마십시오.
그것은 아물려는 상처를 건드려
덧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나간 일은 전생사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겠습니까.
이것을 굳이 들추는 것은 타인을 불행하게 합니다.
자신도 업을 쌓게 됩니다. 업을 계속 들춰내면
남을 불행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사막지대에서 수행하는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수행자가 선배인 원로에게 묻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봤을 때
지적하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 때 원로는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덮어주면
그 때마다 하느님은 우리 잘못을 덮어주시지.
반대로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폭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잘못도
폭로 하신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십니다.
부처님이 계신다고 해도 좋고
누가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불보살이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업의 놀음’입니다.
업이란 무엇입니까. 몸으로 행동하고 입으로
말하고 속으로 그와 같이 생각한 것이 업입니다.
업의 흐름은 한 생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몸의 그림자 따라다니듯 따라다닙니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내 영혼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것은 내 삶의 자취,
찌꺼기인 업입니다.
우리가 신행활동을 하는 것은 업을 맑히는 과정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육도윤회 속에서 사람은 업으로
인해 맺어진 것을 풀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맺힌 것을 풀어야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얽히게 되면 서로가 불편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만,
업은 놓아지지 않습니다. 다음 생까지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업을 풀어야 합니다.
인생의 종점에서 용서 못할 일은 없습니다.
한 세상 ‘업의 놀음’에서 풀려나야 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기르면서 자식의 허물을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성과 남성이 비로소 어머니, 아버지가 됩니다.
대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에 서보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빗장도 열게 합니다.
일단 마음의 문이 열리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런 용서를 통해 마음의 그릇이 커집니다.
이것이 사람이 꽃피는 소식이고 성숙해가는 소식입니다.
불자님들께 당부의 말씀드립니다.
만약 누군가 맺힌 것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다 풀어버리십시오.
자존심 챙길 것 없습니다.
한쪽이 지면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새 잎이 펼쳐지는 눈부신 계절처럼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래야 내 마음의 좋은
기운을 마음껏 펼칠 수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일랑은 저쪽에
부려놓고 가볍게 사십시오.
부디 얽히고설킨 업의 무게에서 벗어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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