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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감산사지 삼층석탑과 감산사 불상
    사찰 풍경 2021. 7. 4. 15:38

    경주 감산사지 삼층 석탑입니다.

    경주 감산사지 삼층석탑(慶州 甘山寺址 三層石塔)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감산사 터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감산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 다시 세웠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이나, 현재 탑신의 2·3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올라 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탑의 일부분을 잃어버려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아쉽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좌상입니다.

    감산사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입니다.

    감산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18년(719)에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부모의 명복과 국왕 및 그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감산사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된 불상으로 머리부분과 앞면의 훼손이 심하고 광배와 대좌도 없어진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를 낮게 표현하였다. 양손은 파손되었던 것을 지권인*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 신체부위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깨가 각이 지고 결가부좌한 양 무릎이 두텁고 넓어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감산사 창건과 연관지어 8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81호)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82호)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신라 성덕왕 18년인 719년에 현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 내동면 신계리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조불상.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와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편집] 총 높이 2.75m.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울산광역시로 가는 길 주변의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감산사(甘山寺)에서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석불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이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황금 소불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83호가 한국의 대표적인 형제 반가사유상이라면, 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형제 석제 거불로 불린다.이 부처상이 만들어진 감산사는 김지성(金志誠)이란 사람이 자신이 소유했던 감산장전(甘山莊田)을 희사하여 세운 절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두 석조아미타불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새겨진 명문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편 남월산(南月山)조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이 두 점의 불상 뒷면에는 불상의 제작을 의뢰한 발원자 및 조성 경위, 조성 배경 등에 관하여 자세하게 적혀 있어 신라시대의 사회·문화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개원(開元) 7년인 성덕왕 18년(719년)에 왕의 기밀 사무를 취급하던 최고 행정기구인 집사성(執事省)의 시랑(지금의 부총리 격)을 지내던 김지성(金志成)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미륵상 1구와 아미타상 1구를 만들었으며 특히 이 아미타여래상은 아버지를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김지성은 평소 자연을 좋아하여 노장자(老莊子)의 유유자적함을 사모하였으며 불교도 중히 여겼다고 하며, 이에 67세가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불교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후 다시 복직되어 관에 들어갔으나 마음만은 불교를 떠나지 못해 모든 재산을 희사하여 감산사를 세웠다고 한다. 감산사를 짓는 공덕은 국왕 이하 여러 친족 및 일체 중생을 제도케 하여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붓다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부분에는 불교의 시원이 서역에서 시작되어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신라에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의 신라 땅이 마치 사위성과 같고 극락과 비슷하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불상을 만든 것은 국주대왕(國主大王), 이찬 개원공(愷元公), 돌아가신 부모님, 돌아가신 동생이자 소사(小舍)였던 양성(梁誠, 김양성), 사문 현도(玄度), 돌아가신 아내 고로리(古路里), 돌아가신 누이동생 고보리(古寶里)와 함께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작은 발원의 인연으로 인하여 모두 피안(彼岸)에 오르고 사생육도(四生六道)가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는데, 문장은 내마(奈麻)인 총(聰)이 짓고, 사문 경융(京融)과 대사(大舍) 김취원(金驟源)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아버지 인장일길간이 향년 37세에 돌아가시자 동해에 뼈를 뿌렸다는 내용과 성덕왕 19년(720) 4월 22일에 김지전이 죽었다는 내용도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후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 불상을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으로 지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 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별하고 있으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 는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 아니라, 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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