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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전설을 꽃피우다
요즘 능소화(凌霄花)가 피고 있다. 어느 집 대문 옆의 키 큰 나무에도, 누구네 집의
담장 위에도, 아파트 측면 벽에도 주황색 능소화(凌霄花)가 주렁주렁 매달려 피고 있다.
꽃이 피면서도 능소화 덩굴은 자꾸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자꾸 위로 올라가면서 새
꽃을 피우고 있다. 담쟁이덩굴처럼 나무나 벽을 타고 오르며, 나팔꽃 모양의 아름다운
꽃을 매달고 있다. 금등화(金藤花), 어사화(御史花)라고도 불리며, 여름 장마철에 피기
때문에 ‘능소화가 피면 장마가 진다’는 말도 있다. 뜨거운 여름 복중(伏中)에 피는 이
아름다운 여름꽃 능소화(凌霄花)에는 뜨겁고 안타까운 전설이 있다.
한창 무르익은 젊음이요, 결 고운 살결에 복중(伏中) 더위는 소화의 뺨을
잘 익은 복숭아 빛으로 만들고 있다. 대궐의 구중심처에는 바람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대궐 후원을 거니는 소화는 지난밤 꿈에 마음이 뒤숭숭하다.
소화는 붉은 해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놀라 떨쳐내며 잠이 깨었던 것이다.
임금은 오늘 따라 평소에 발길을 하지 않던 별궁의 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따르는 사람들도 물리고 혼자 걸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고 싶었다.
길고 높은 담장을 끼고 돌아 대궐 뒤쪽 깊숙한 후원의 키 큰 나무들이 있는 그늘진
숲으로 들어갔다.
기를 쓰고 울던 매미들도 울음을 멈추고, 한낮의 고요한 정적과 숲의 푸른 기운이
한결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임금은 한 곳에 눈길을 멈추었다.
한 궁녀가 먼 데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나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을 거리인데도 모르고 있다.
복사꽃 같은 뺨이 수밀도(水蜜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물면 단물이 철철 흐를 것
같다. 임금은 무슨 생각이 저리 깊을까. 그녀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룻밤 황은(皇恩)을 입은 궁녀 소화는 빈(嬪)의 자리에 올랐다.
소화의 아름다운 자태는 기품이 있었고, 심성은 맑은 샘물이었다.
긴 장마도, 더위도 가고, 가을이 왔다.
숲에 단풍이 들고,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도 임금은 오시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와도 임금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
뒷배를 봐 줄 사람이 없는 소화는 임금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
구중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처소를 가진 소화는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발길 서성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혹시나 해서 발돋움을 하여 담장 너머를 살피고 또 살폈다.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임금을 향한 그리움에 지친 소화는 어느 해 무더운 여름 날 상사병(相思病)으로
몸져 눕게 되고, 이 열병으로 그녀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빈(嬪)이였지만 잊혀진 여인은 대궐에서 초상조차도 치루어지지 않았다.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상감마마를 기다리겠노라’는 유언에 따라
시녀들은 소화를 담장 밑에 묻어 주었다.
다음해 소화의 무덤에서는 한 줄기 덩굴나무가 자라 담장을 덮었다.
이 덩굴은 더 멀리 담장 밖을 보려고 그러는지 자꾸만 높이 기어올랐다.
담장 밖으로 임금을 보려는 소화의 간절한 마음이 자꾸만 높이 기어오르나보다.
임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소화가 귀를 열고 있음인지, 주황색 꽃은 나팔
처럼 꽃잎을 넓게 벌리고 있다.
꽃 수술에는 독성이 있어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失明)할 수도 있다.
상감마마 외에는 건드릴 수 없다는 소화의 마음이나, 소화의 한(恨)일 것이다.
꽃이 질 때는 시들어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져 산화(散花)하는 일반꽃과는 달리 꽃이
통째로 떨어진다. 낙화(落花)의 순간까지 고운 빛깔과 자태를 잃지 않음은 궁녀
소화의 의연한 기품일 것이다.
꽃말은 ‘명예, 영광’이다.
옛날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면 임금이 머리에 씌워 주는 어사화(御史花) 화관이
바로 능소화(凌霄花)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양반꽃’이라 하여 평민의 집에는 심을
수가 없었다. 만일 평민집에 심으면 잡아다 곤장을 쳤다.
서양에서는 나무나 벽 등을 타고 오르는 나무의 성질과 트럼펫을 닮은 꽃모양으로
‘trumpet creeper'라고 부르고 있다.
능소화(凌霄花)는 꿀풀목 능소화과의 식물이다. 학명은 Campsis grandiflora이다.
중국 원산의 갈잎 덩굴나무이다. 담쟁이덩굴처럼 줄기의 마디에 생기는 흡반이라
부르는 뿌리를 건물의 벽이나 다른 나무에 붙여 가며 타고 오른다.
6월 말경부터 9월 초순경까지 가지 끝에서 나팔처럼 벌어진 주황색의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