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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1일 설명절 이튼날 청명한 날씨에 찾은 부산의 범어사 풍경입니다.
연초 새해의 소망을 기원드리기 위해서인지 범어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부처님 전에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산의 대표 적 사찰 범어사 천년 고찰 답게 많은 불자들이 찾는 불심이 흐르고 있는 유서깊은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부산의 금정산 금샘에 하늘의 황금빛 물고기가 내려와서 산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범어사 고찰답게 고풍어린 아름다움이 풍기는
건물이 아름다운 전통 사찰입니다.
일주문인 조계문(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어사 입구.소나무 풍경이 운치가 있습니다
돌담길이 아름답지요.
범어사 경내
우측에 미륵전.비로전입니다.
미륵전.비로전
관음전 고풍스런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대웅전도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입니다.
대웅전 앞에서의 풍경입니다.
지장전입니다.
약사전 작은 건물인데 아름답지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입니다
돌담길이 멎지네요.
대웅전
관음전
신라시대때 조성된 범어사 삼층석탑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설법전
범어사 가는 길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岩)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물빛은 금색(金色)에다 물 속에 범천(梵天)의 고기가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고 하였다.
범어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는 1700년(숙종 26)에 동계(東溪)가 편찬, 간행한 목판본 ≪범어사창건사적 梵魚寺創建事蹟≫이 현존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문종 태화(太和) 19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의상(義湘)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華嚴義持法門)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들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하였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적기의 창건연대인 흥덕왕 때는 826년에서 835년까지이므로 이미 702년에 죽은 의상의 창건이라고 한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신라화엄십찰(新羅華嚴十刹)의 하나인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0년(문무왕 10)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상이 창건하고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또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하나로서 중요한 가람이 되었다.
신라 당시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모셨던 2층의 미륵전(彌勒殿)을 중심으로 서쪽에 3칸의 비로전(毘盧殿)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세우고 대장경과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 및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이 밖에도 천왕신전(天王神殿)·유성전(流星殿)·종루(鐘樓)·강전(講殿)·식당(食堂)·목욕원(沐浴院) 및 33천(天)을 조성한 철당(鐵堂), 중료(衆寮) 360방사가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 있었다고 한다. 사적에는 이러한 사찰의 규모가 창건 당시에 다 갖추어진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된 규모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계환(戒環)·법인(法仁)·천원(天元)·덕균(德均)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 중창하였다.
그 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현재 경상남도 3대사찰로 발전하였다. 이 절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주인 의상과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源), 근대의 고승 경허(鏡虛), 한용운(韓龍雲), 동산(東山) 등이 있다.
특히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는 1613년에 묘전이 중건한 이후의 역대 주지와 그 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① 주지시대(住持時代) 132년간 87대, ② 승통시대(僧統時代) 166년간 177대, ③ 총섭시대(摠攝時代) 14년간 11대, ④ 섭리시대(攝理時代) 4년간 3대, ⑤ 주지시대 39년간 8대로 구분하여 1947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지라는 사찰의 책임자에 대한 호칭이 조선시대에 승통·총섭·섭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 절은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정산 동쪽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그 아래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 등을 차례로 배치하고 다시 7m 높이의 축대 위에 보제루(普濟樓)를 배치하였다. 보제루 좌우에는 심검당(尋劍堂)·비로전·미륵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일반 사찰의 경우에는 심검당과 대칭이 되는 곳에 강원인 강설당(講說堂)과 같은 건물이 놓이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곳에 법당이 있어 특이한 가람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비로전과 미륵전의 뒤쪽에는 선원(禪院)이 배치되어 있으며, 선원 바로 아래 낮은 지역에는 요사채들이 있고 그 옆에는 종무소 건물이 있다. 또 심검당 뒤쪽에는 강당(講堂)이 있고, 강당의 뒷건물들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후원(後院)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보다 7∼8m 높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爐殿僧)의 거처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이 위치한다.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고 그 뒤쪽에는 서향각(西香閣)과 크고 작은 요사채가 있으며, 그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비켜서 팔상전(捌相殿)·독성각(獨聖閣)·나한전(羅漢殿)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산령각(山靈閣)이 있음도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체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상단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 중간부분인 보제루 주위의 당우들, 하단의 건물인 보제루 아래쪽의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들이다. 이와 같이 건물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은 산지가람의 지형에 따르는 배치방법이다.
현존하는 당우를 보면, 절 입구의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이룩된 3칸 건물로서 건물의 기둥은 아랫부분 3분의 2 정도까지 석주로써 조성하였고, 그 위에 다포(多包)의 맞배지붕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의 우측에는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 좌측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 중앙에는 작은 글씨로 ‘曹溪門(조계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벽에는 신장의 벽화를 그려 천왕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문의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의 탱화를 안치하였다. 불이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범어사로 통하는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의 기둥에는 근대의 고승 동산(東山)이 쓴 주련이 있다. 보제루는 모든 법요식(法要式)이 행해지는 곳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서 범어사의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보제루 북쪽에는 사방 3칸의 종루(鐘樓)가 있다. 범종과 대북 등의 의식용구가 갖추어진 2층 누각건물이다. 미륵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한 목조불상을, 전면과 좌우에는 영탱(影幀)을 봉안하였다. 비로전의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의 초석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2년에 중건, 1613년에 중수한 맞배집으로서 다포식 건물이다. 대웅전 왼쪽의 명부전은 전면과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주존불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지장보살의 주위에는 판관(判官)·녹사(錄使) 등의 상을 배치하고 있다. 관음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과 불경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이 거처하는 일로향각이 있으며, 명부전 뒤쪽에는 서향각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동향하고 있다. 이 건물 내부에는 부처님의 탱화가 있고 그 곁에는 동래 정희조 내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옆 칠층석탑의 건립 등 범어사의 대시주였다.
서향각 뒤쪽에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건물이 한 채로 연이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삼존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했고, 독성전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과 십육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1칸의 길다란 건물이다. 이 밖에도 조그마한 산령각과 해행당(解行堂) 등 수십 칸의 요사채가 있고 종무소가 현존하고 있다.
이 절의 석조물로는 보제루 앞 뜰에 신라시대의 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이 있고, 대웅전의 남쪽에는 거대한 칠층석탑이 있다. 이 칠층석탑은 근세 인도승이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탑으로서 전통적인 신라 석탑 형식에 다소 변화를 주어 새로 건립한 것이다. 삼층석탑에서 약 20m 남쪽에 위치한 곳에 범어사 유일의 석등(石燈)이 있는데 건립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괘불(卦佛)을 시설하는 석조괘불대가 있고, 일주문 밖에 소형 석조폐탑(石造廢塔) 등이 있으며, 일주문 옆 숲속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고, 그 비석 아래쪽에 고승 동산의 석조부도(石造浮屠)가 있다. 이 부도는 최근의 작품이지만 고려 이래의 전통적 석조부도의 형태에 각종 장엄을 가미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사중보물(寺中寶物)로는 전의상대사옥인(傳義湘大師玉印)과 구룡병풍(九龍屛風)·삼층석탑·옥와(玉瓦)·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금강저(金剛杵)·목조미륵불(木造彌勒佛)·범종(梵鐘)·어병(御屛)·오동향로(烏銅香爐) 등이 있다.
이 중 옥인은 원효의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산내암자인 원효암(元曉庵) 우물 보수중 발견한 것이며, 널리 화엄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張大敎網鹿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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